운명이였다면
매일 데려다주던 남부터미널 역을 나와 집 쪽으로 걸어가는 길. 이미 내 마음 한편에는 이 친구도 내 마음을 이해할 거라는 생각과 동시에 혹시라도 내가 이 관계를 이런 식으로 끝내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면 어떡하지?라는 걱정도 있었다. 사실 누가 봐도 일반적이지 않은 이유와 굳이 잘 만나고 있는데 다가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한 걱정 때문에 지금 생이별을 한다는 것이 대부분 사람들에게는 궤변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자아성찰과 현실 속 '사랑'을 고려해 봤을 때 내가 이 여자친구와 '결혼'을 할 수 있을 확률을 조금이라도 높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집 앞에 다 왔을 무렵 다시 그녀의 손을 이끌고 근처 공원으로 향했다. 모든 상황설명과 계획을 얘기했고 롱디를 하지 않으려는 이유는 그것이 나의 이기심일 거라 얘기를 했다. 나는 곁에 있어줄 수도 그리고 떨어진 시간이 얼마나 길어질지도 모르는 상황에 다시 고무신을 신기는 것처럼 나만 바라보며 기다려달라고 할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나 조금 더 어른이 된 이후에 저 결정을 되돌아보니 사실 그것은 이미 이기적인 나 자신이 덜 죄책감을 느끼기 위해 했던 결정이라고 보였다. 예상대로 여자친구는 생각보다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나를 이해한다고 얘기했다. 하지만 그녀의 흐르는 눈물은 숨길 수가 없었고 나 또한 그 비극적인 상황에 수많은 감정들이 섞여 그저 둘이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기만 했던 기억이 난다. 결론만 얘기하자면 극적이었던 나의 결심과 행동과는 전혀 반대로 나는 1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여자친구 또한 내가 한국을 떠난 후 몇 달 있지 않아 새로운 남자친구를 만나서 잘 지내게 되었다. 그렇다고 그때 당시 우리가 가졌던 마음가짐과 감정이 거짓이었던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인간이 그렇듯 우리는 주워진 환경 안에서의 행복을 추구하게끔 되어있다. 한국으로 돌아오고 나서 단 한 번도 그 여자친구에게 연락을 취했던 적은 없었다. 싸이월드로 훔쳐본 게 전부였지만 그 당시 만나던 남자분은 상당히 인상도 좋았고 재력도 있어 보였기에 내가 해주지 못한 그런 부분까지도 챙겨주며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친구와의 마지막 비하인드 스토리를 하나 더 얘기하자면 내가 서른 살 즈음되던 해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메일을 보냈던 적이 있었다. 딱히 다시 잘해보려던 마음보다는 그냥 그 친구에게 마지막으로나마 내 존재에 대해 다시 한번 각인시켜보고 싶었던 것 같다. 결론은 답장을 받지 못한 채로 끝이 났고 나도 그렇게 잊고 살고 있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 내가 호주로 이민을 가기로 완전히 결정이 된 시점 즈음 메일 한통을 받게 된다. 그 여자친구의 메일이었고 내용인 즉 예전에 쓰던 이메일 주소를 오랫동안 안 쓰다가 이번에 다시 계정을 열게 되면서 쌓인 이메일들을 정리하던 중에 내 메일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한다. 메일을 읽으며 가슴이 너무 벅찼던 이유는 그녀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을 늘 하고 있었으며 언젠가는 꼭 한번 만나 뭐가 됐든 무엇에 관해서든 이야기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아주 짧게나마 우리가 돌고 돌아 이렇게 다시 만나질 수 있는 건가라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내년에 결혼을 하기로 한 약혼녀의 신분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만약 그녀가 내 메일을 조금이라도 일찍 발견했다면 과연 우리의 이야기는 달라졌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