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밥을 먹다가 고개를 숙이면서 또 입속의 씹던 음식을 밥그릇으로 떨어뜨렸다.
동료 4명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던 중에 그런 일이 벌어졌다. 고개를 숙인 상태였고 밥그릇과 얼굴의 거리가 멀지 않았기 때문에 누가 보았을 것 같지는 않았다. 마주 앉은 사람이 혹시라도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면 눈치를 챘을 수도 있었다.
떨어진 것은 국물이 섞인 상태로 분쇄된 작은 밥 뭉치였다. 바로 전에 씹던 김치와 다른 반찬이 약간 섞여 다채로운 색깔을 냈지만 그날 나온 밥은 마침 볶음밥이어서 다행이었다. 각종 야채와 고기로 이미 알록달록 색이 든 밥 더미 위로 떨어지는 바람에 티 나게 차이가 나지는 않았다. 낙하 순간을 포착하지 못했다면 무엇이 무엇인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은 정도였다. 당황한 나는 고개를 숙인 상태에서 서둘러 흘린 밥 뭉치를 먼저 먹었다. 상황은 그럭저럭 깔끔하게 종료됐다.
씹고 있는 입속의 밥이 고개를 숙였을 때 떨어지는 현상은 얼마 전부터 가끔 발생하고 있다. 밥을 씹으며 반찬을 더 먹기 위해 입을 벌릴 때 벌어지는 일이다. 반찬을 더 넣으려면 고개를 숙이고 입을 열어야 하는데 바로 그 순간 입속에 있던 음식이 떨어지는 것이다.
다행히 와장창 많이 떨어지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그 난감함은 이루 말을 할 수가 없다.
‘갑자기 왜 이렇게 중력이 작동을 하지? 내가 유난히 게걸스럽게 먹고 있나?’
내가 식탐이 있는 편이기는 하다. 그렇다고 해도 그런 욕심이 얼마 전 새롭게 생긴 것은 아니다. 식욕으로 보면 예전보다 못해졌으면 못해졌지 더 강해진 것은 아니다. 먹는 양도 다소 줄었다. 어느 정도 먹으면 남은 음식을 보고도 ‘이제 그만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으니 예전과 달라진 것은 분명하다. 그렇게 보면 식탐을 탓하기는 어렵다. 무엇인가 다른 이유가 있어야 한다.
예전에는 이런 ‘사건’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의식을 하고 대비한 적도 당연히 없었다. 씹던 음식이 처음 입 밖으로 떨어졌을 때, 그래서 무척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선명하다.
‘아니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호들갑스럽게 몸을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심정은 그 이상으로 동요했다. 멀쩡하게 입속에 붙어 있어야 할 음식이 고개를 숙이며 입을 벌리자 갑자기 툭 떨어진 것이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나의 몸이 한 짓을 보고 내가 그렇게 황당스럽게 느낀 적이 그전에 있었나 싶었다.
떨어지는 음식을 잡지 못한 나의 난망한 반사 신경은 즉각 실수라고 반응했다. 음식이 입 밖으로 나오는 것과 동시에 반사적으로 든 생각이었다. 표면의 마음은 그것에 동의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나는 알았다. 실수와는 약간 다르다는 머릿속 깊은 곳의 반응을 나는 감지했다. 예사롭지 않은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무척 망연한 일이지만 자주 일어나는 것은 아니어서 예민하게 경계할 수도 없었다. 항상 경계 태세를 유지하려면 입의 동작과 관련된 나의 반사 신경을 꺼야 한다. 그리고 입속에 음식을 넣는 것, 씹는 것 하나하나를 모두 의식의 통제 아래 수행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가능한 일이 아니다.
나는 입 속의 동작이 온통 반사 신경 투성이라는 것을 안다. 작은 음식물이 하나 들어가 씹히는 과정을, 적당한 속도로 반사 작용을 통제하면서 느껴 본 적이 있다. 치과 치료 후 한동안 자주 혀를 씹던 나는 자가 처방을 위해 실험을 한번 해 보았다.
아래윗니는 기계적으로 상하운동을 하는 것 같지만 그것이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았다. 이빨들이 음식물에 닿기 전에 혀와 입술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음식물의 위치를 앞으로 뒤로 옮겨 놓았다. 음식물이 잘 씹히도록 하는 것이다. 나의 의지와는 상관도 없는 작용이고 의식은 그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간발의 차이로 혀와 입술이 빠질 때 아래윗니는 정확하게 맞닿으며 음식을 갈고 분쇄했다.
아주 약간의 차질이 발생해도 혀와 입술이 음식을 이빨 사이로 밀어 넣지 못하거나, 반대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혀와 입술을 이빨이 씹는 ‘참사’가 발생하거나 할 일이었다. 이빨은 혀를 포함한 입속의 각 부위와 전후좌우로 긴밀하고 정교한 협력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아래윗니는 약간씩 달라지는 시점을 적절하게 찾고 그에 맞는 속도와 강도로 부딪치고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간발의 시차도 없이 이 부산한 작업이 진행된다. 단 1초에도 몇 차례 벌어지는 협업이 아주 간혹 꼬일 때 이미 움직임을 시작한 아래윗니가 혀나 입술을 씹는 일이 벌어진다.
나의 경험으로는 반사 신경에 비해 의식의 통제와 명령이 훨씬 느리다. 그래서 의식을 하고 움직임을 통제한다면 오히려 엇박자가 날 가능성이 높다. 만약 억지로 의식이 개입해 본다면 주로 아래윗니를 통제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아마 적절하게 분쇄되지 못한 밥알은 침에 빠져 녹아버릴 것이다. 다른 반찬은 제대로 씹히지도 못한 채, 그렇다고 삼켜지지도 못하고 입 속을 맴돌 것이다. 그리고 또한 반사적으로 끊임없이 솟아나는 침만 꿀꺽꿀꺽 삼켜야 할 것 같다.
다치지 않고 밥을 맛있게 먹으려면 모든 것을 반사 신경에 맡기고 무사하기를 기원하는 것이 낫다. 입속의 반사 작용을 의식적 계획의 범주에 넣고 통제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그런데 어쩌나, 안 그렇던 그 반사 작용이 삐거덕거리고 있는 것이다.
한번 상상을 해 보았다. 만약 나의 앞에서 밥을 먹고 있는 동료가 비슷한 행동을 하는 것을 보았다면 어떤 느낌일까. 먼저 지저분해 보일 것 같았다. 그것이 노년의 생리적 현상으로 이해가 된다면 몹시 애색스러울 것 같았다. 그가 당황하며 그 행동을 가리려다 실수라도 한다면 동병상련의 감정이 울컥 솟아 코가 찡해지고 눈이 볼록해질지도 모르겠다. 나를 목격한 나의 동료에게 똑같은 감정이 흐를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나에게 나타나는 그런 현상은 방지해야 할 일이었다. 아직 그렇게 보일 때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간헐적이지만 지속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이 낭패스러운 일을 어떻게 방지해야 하나. 신경을 쓸 수도, 쓰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이 막연하게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며칠 전에 난감한 일이 또 발생한 것이다.
딱히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던 차에 건강과 관련한 뉴스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구강 근육 강화.’
단어 그 자체로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지만 입 속에 있는 그 부분들이 근육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무런 문제만 없으면 그것이 근육이든 그 어떤 것이든 무슨 상관이랴!). 그러고 보니 혀도 근육 덩어리였고 입술, 볼 등이 모두 근육이었다. 입은 이빨을 빼면 모두 각종 근육으로 이루어진 조직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근육이 감소하고 탄력이 떨어진다는 것을 이미 이해하고 있으니 구강 근육 역시 예외가 아니라는 것이 새로울 것도 없었다. 따지고 보면 근육으로 이루어진 입은 총체적 난국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입 속의 모든 부분이 느슨해지면서 반사 작용이 즉각 이행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런 과정이 나에게 이런 황당한 현상으로 나타날 줄이야...’
대부분의 기사가 그렇듯이 약화된 구강 근육으로 인한 증상은 대단히 전형적이고 뚜렷했다. 음식을 흘리는 것에서 더 나아가 침까지 흘리게 되고 음식을 씹거나 삼키는 데에도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고 했다. 이는 영양 부족을 초래할 수 있고 심지어 폐렴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고 했다. 다소 극단적 전개임에 틀림이 없지만 그 시작의 언저리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창피함이나 가벼운 염려 수준으로 접근할 사안이 아니었다.
간혹 음식을 조금씩 떨어뜨려 곤란하던 걱정은 이제 생존에 치명적 문제를 야기하는 질환의 전조로 격상돼 버렸다. 기사는 친절하게 예방 혹은 처방까지 마련하고 있었다. 그것이 구강근육 강화법이었다. 대체적인 방법은 다른 근육을 단련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극단적으로 힘을 주었다가 빼거나, 팽창시켰다가 수축시키는 등속의 과정을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근육을 최대한 움직이게 해 연단하는 방법이었다.
증상 없이 나이가 들고 있는 사람에게는 예방이 될 것이고 나처럼 경미하게나마 초입에 들어선 사람에게는 처방이 될 것이었다. 모양이 많이 빠질 것 같은 행동이지만 다행히 그다지 어려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미 익숙해져 버린 또 하나가 더 있다. 언제부터인지 유독 국물을 먹을 때 간혹 조금씩 흘리는 일이 있었다. 한두 방울 정도에, 자주 일어나는 일은 아니어서 크게 불편을 느끼지는 않았다. 다만 국물을 유난히 좋아하는 나에게는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숟가락 모양을 의심하기도 하고 ‘너무 서둘러 먹는 것이 아닌가.’ 태도를 탓하기도 했지만 이것 역시 ‘증상’으로 보는 것이 오히려 안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비로소 든다.
몸에서 일어나는, 전에 없던 현상의 많은 이유는 아마 세월일 것이다. 노화는 새삼 전면적인 과정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우리는 세월의 기차를 타고 어디 하나 예외 없이 온몸으로 시간의 마모를 견디고 있는 것이다. 근육에 시간의 무게가 쌓여갈 때 입으로도 노화가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