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살, 세 살인 두 손주들은 다행히 긴 비행시간을 잘 견디어 주었고 공항에서 거의 한 달 만에 제 아빠와 반가운 재회를 했다.
아들집은 시애틀 중심이라는 벨뷔라는 곳인데 중심 상가에서 약간 벗어나 키 높은 나무들 사이에 미국스러운 집들이 아담하게 자리한 동네다. 아들 말로는 집값은 조금 비싸도 회사와 가깝고 아이들 학교 보내기 좋은 안전한 동네라고 한다.
남편과 나 그리고 며느리와 두 손주들은 기내용 가방을 빼고도 14개의 수화물을 들고 미국에 왔다. 물론 한 달 전 미리 보낸 이삿짐을 제외하고다.
다행히 미국 도착이틀 뒤에 이삿짐을 받을 수 있었다. 다른 이주자들에 비하면 아주 빠른 배송이라고 했지만 첫날은 들고 간 14개의 캐리어를 풀어서 가지고 간 식품과 담요를 꺼내 먹고 자야만 했다. 살림살이는 별로 없지만 급하게 코스트코와 한인마트에서 장을 봐서 소고기 뭇국을 끓이고 가져간 김치와 먹으니 긴 비행에서 오는 멀미와 피로도 조금은 풀리는 듯했다.
아빠를 기다리는 손주
김치와 건어물등 식품류를 싸들고 오면서 혹시라도 출입국심사에 걸려서 이런저런 설명을 해야 하면 어쩌나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 아무것도 묻지 않고 통과시켜 줘서 편하게 한국식 밥을 먹으니 미국에 온 것이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시차 적응까지 빨리 되지는 않는 듯. 너무나 피곤했지만 잠은 잘 오지 않았고 뒤척이다 뒤척이다 수면유도제라는 에드빌 PM 한 알을 먹고서야 잠이 들 수 있었다. 며느리는 이미 아이들에게 젤리형 멜라토닌을 먹였다고 했다. 어쩐지 잠을 잘 자더라니.
미국으로 이사 온 바로 다음날. 5살 된 큰 손주 서안이가 첫 등원을 했다. 며칠 더 쉬지 않고 보내기로 한 것은 마침 입학과 개학이 겹치는 날이라 다른 친구들도 모두 어색할 때 보내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모두 처음 유치원에 오는 친구들이라 낯설고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이지 싶었다.
오빠 킨더가든에 같이 가고 싶다는 손녀
서안이는 영어를 하지 못한다. 한국 어린이집에서 몇 마디 인사나 영어 노래 정도를 배워왔을 뿐 알파벳도 하나 모르는 아이인데 다짜고짜 미국 킨더가든에 입학을 한다니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아이 역시 미국이라는 나라에 처음 와서 얼마나 긴장되고 겁이 날까 했는데 그것은 순전히 어른들의 걱정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정작 아이는 신나게 뛰어서 학교에 갔고 몇몇 아이들이 엄마와 헤어지기 싫어 울고 있는 와중에도 의연하게 교실에서 나가는 엄마 손을 선선히 놓아주더란다.
“다 컸네, 다 컸어”
입학 첫날 수업은 오후 2시 30에 마쳤다. 하교 시간에 맞추어 픽업을 하러 가보니 이미 많은 학부모들이 아이들을 픽업하러 학교 앞에 와 있다. 잘 해냈을까. 영어를 말하지도 알아듣지도 못하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겁나지는 않았을까. 힘들지는 않았을까. 제 엄마는 물론 남편과 나도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하교하는 아이의 표정을 지켜보았다.
“엄마~ 할머니~”
다행히 아이의 표정이 밝다. 담임선생님이 영어를 못해도 심벌로 몸짓으로 다양하게 이해시키고 가르칠 테니 아무 걱정 말라고 했다더니 정말 그랬나 보다.
“엄마, 나 한 번만 울었어. 점심 먹기 전에 엄마 보고 싶어서 울었고 그다음엔 울지 않았어. 그리고 재미있었어. 또 학교에 갈 거야.”
첫날 수업도 잘 보냈다는 손주
아직은 영어보다 한국말이 익숙하고 편한 서안이. 할머니와도 한국말로 편하게 이야기하는 이 아이가 어쩌면 얼마 후에는 한국말보다는 영어가 더 편해질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 스스로 해결해야 할 어려움도 적지 않겠지. 3살 된 서안이 동생 나은이도 곧 프리스쿨에 가게 될 텐데 그 녀석 역시 처음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그러나 어린 나이에 다른 언어에 노출되어 자연스럽게 이중언어를 습득할 수 있게 되는 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싶다.
미국에 올 때 태권도도복과 한복 입은 입은 인형들을 챙겨 왔다. 친구들에게 자랑스럽게 한국을 소개하고 보여주기 위해서다. 아직은 어린 손주들이 자신의 나라 대한민국을 기억하고 자랑스러워하는 아이들로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