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나라의 앨리스
앨리스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대기실의 초록빛이었다. 그 방에 있는 모든 물체들은 초록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정면에는 유리창으로 된 초록색 창문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그 창문은 특이하게도 실내로 초록빛을 쏟아내고 있었다. 아래 놓인 작은 초록색 원형 탁자 위에는 신비로운 느낌의 초록색 커피잔과 대본이 어우러져 있었다.
좌측 벽에는 몇 개의 날개 달린 초록색 나무 걸이가 떠 있었다. 다양한 형태와 스타일의 초록색 의상들이 걸려 있는 나무 장식들은 초록색 옷들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우측 벽에는 초록색 화장대가 있었고 그 위에는 초록색 테두리의 거울이 있었다. 화장 도구가 담긴 나무 서랍장은 열려 있어 초록색 브러시, 립스틱, 볼 루즈, 머리핀 등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방의 중심에는 편안한 초록색 가죽 소파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몇 개의 부드러운 초록색 베개와 흩어져 있는 초록색 두루마기가 있었다.
배우들 몇몇이 초록색 옷을 입고 화장을 고치고 있었다. 분장사들과 미용사들도 바쁘게 움직였다. 그들은 초록색의 아름다움을 최대한 끌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이곳에서 너는 무엇으로든지 변장할 수 있어," 캐럴이 말했다. 그가 입고 있는 정장은 초록색으로 보였으며 그의 피부색과 머리색도 초록색으로 보였다. 캐럴의 모습은 이 방의 일부분인 듯 자연스러웠다.
"이제 우리의 티 타임이야." 캐럴이 손짓하자 대기하고 있던 한 비서가 한 켠에 놓인 초록색 커피콩을 분쇄기에 넣었다. 그녀가 분쇄기의 손잡이를 천천히 돌리자 커피콩이 갈리는 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대기실 밖에서는 루이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루이스의 목소리와 커피콩이 갈리는 소리가 어우러져 클라이맥스의 시작을 알리는 음악처럼 들렸다.
"루이스 씨의 연설이 클라이맥스에 다다랐을 때 우리가 등장해야 해," 캐럴이 말했다. 분쇄된 짙은 초록색 커피 가루의 강렬한 향이 대기실 가득 퍼졌다. 앨리스는 비서가 끓는 물이 담긴 주전자를 가져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초록색 물방울이 주전자의 뚜껑을 통해 뛰어올랐다. 끓는 물의 소리는 마치 자연의 소리처럼 들렸다.
"문을 향해 나가고 나면, 내가 적절한 시점에 발을 당길 테니, 앨리스, 너는 테오도어를 향해 달려가면 돼," 캐럴이 방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비서는 끓는 물을 고운 종이에 붓고 물이 천천히 커피를 적시며 커피의 향이 더욱 진해졌다. 커피가 종이를 통과하면서 잔에 들어가는 모습이 마치 초록색의 작은 폭포처럼 보였다.
캐럴은 초록색의 커피를 전해받곤 앨리스에게 내밀었다. 앨리스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커피의 맛은 썼지만 상쾌한 풀 향이 났으며 그 안에는 달콤함이 감추어져 있었다. 곧 앨리스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기분에 휩싸였다.
대기실 한 켠에서 한 여배우가 머리를 묶은 채 대본을 열심히 읽고 있었다. 그녀는 앨리스의 하녀인 플레선스와 똑같이 생겼다. 예상치 못한 얼굴에 앨리스는 깜짝 놀랐다. 캐럴은 앨리스가 느낀 혼동을 알아차리고, 그 장면을 재미있어하며 지켜보고 있었다. 앨리스는 그 여인에게 다가가 물었다. "플레선스?"그 여인이 안경 너머로 앨리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놀라움과 기쁨이 동시에 떠올랐다.
"아, 앨리스! 너구나!"그녀는 사자처럼 몸을 쭉 펴며 대기실 구석에서 일어나더니, 앨리스를 꽉 껴안았다. 그녀의 움직임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어쩐지 앨리스는 그녀의 존재가 낯설게 느껴졌다. 그 여배우가 본인이 아는 플레선스와는 조금 다른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안녕, 나는 리델(Liddell)이라고 해."여배우가 자신을 소개했다. 앨리스는 리델이 청한 악수를 받으며 그녀를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리델은 플레선스랑 똑같이 생겼지만, 좀 더... 야망 있어 보여,’앨리스는 생각했다.
리델은 앨리스의 시선을 느끼고는 깔깔 웃었다. "앨리스, 나는 스마트(Smart) 플레선스를 연기하고 있어. 캐럴의 관능적인(Sensual) 플레선스와는 다른 연기 스타일이지." 그녀는 장난스럽게 캐럴을 돌아보았다. 캐럴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앨리스, 너는 아마 스마트 플레선스를 많이 본 적이 없을 거야. 그녀는 집에서 아주 중요한 존재야. 이번 행사는 거의 전부 그녀가 계획했어."캐럴이 리델에 대해 설명했다. 앨리스는 서재에서 만났던 플레선스를 떠올렸다. 그 플레선스는 캐럴이 흉내 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제 여기, 이 다른 플레선스가 그녀 앞에 있었다.
"아니 도대체 플레선스가 몇 명인거야?"앨리스가 물었다. 캐럴이 웃으며 대답했다."나와 리델은 플레선스를 연기하는 배우일 뿐이지, 플레선스 자체는 아니야. 오리지널 플레선스가 따로 있어. 앨리스는 리델 앞에 놓인 대본을 보았다. 대본은 그녀의 손글씨로 쓰여 있었다."전에 봤던 플레선스보다 더 계획적이네,"앨리스가 말했다.
리델은 자랑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그랜드볼룸의 행사에 대해서는 계획부터 예산 관리, 재료 구매, 조경 작업, 초대장 발송까지 전부 내가 했어," 그녀는 뽐내듯 설명했다. "앨리스, 다음 장면에서 우리는 같이 연기할 거야. 내가 선배로서 몇 가지 비밀을 알려줄게."리델의 눈이 반짝이며 앨리스의 손을 잡았다.
"성공적인 공연을 위해서는 목적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해. 모든 스토리라인과 결말을 아는 게 제일 좋지만, 연극에서는 때때로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하기도 하니까. 어떤 관객은 무대에 뛰어오르기도 해. 그러니까 앨리스, 무대에 서기 전에 너만의 계획을 가져야 해. 내 목표는 빨리 새로운 역할을 확보하는 거야. 그러려면 이 연극이 순조롭게 끝나도록 해야 해."
그녀는 가볍게 앨리스의 어깨를 두드렸다."앨리스, 너는 연기하는 이유가 있어?" 리델이 물었다. 앨리스는 잠시 생각한 후 대답했다. "나도 너와 비슷한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아, 리델. 내 목표는 현실 세계에서 다시 원래의 앨리스로 돌아가는 거야." 리델은 밝게 웃었다. "좋아,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훌륭한 공연을 하길 바래.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기더라도, 너는 잘 대처할 수 있을 거야. 목표가 있으면 상황에 맞게 계획을 조정할 수 있으니까."
작가의 말
이 작품은 현실과 연극, 그리고 정체성의 경계를 탐구하는 이야기입니다. 주인공 앨리스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다시 정의하게 됩니다. 등장인물들이 각기 다른 플레선스를 연기하는 모습은 우리가 사회 속에서 맡게 되는 다양한 사회적 역할을 상징합니다. 앨리스가 느끼는 혼동과 낯섦은 우리의 일상에서도 종종 마주하는 감정입니다.
리델과 앨리스의 대화를 통해 목표와 계획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예상치 못한 상황에 대처하는 법을 이야기합니다. 이는 연극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도 중요한 교훈이 됩니다. 우리가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배우와 다를 바 없으며, 각자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면서도 유연하게 대응해야 함을 상기시키고자 합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각자의 사회적 역할을 보다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길 바랍니다. 삶이라는 연극에서 우리는 모두 배우이며, 우리의 선택과 행동이 이야기를 완성해 나간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