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수영을 갔다 왔다. 자유 수영 시간에 가면 초급, 중급, 오리발 사용 레인 중 원하는 레인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데, 나는 그중에서도 실력이 가장 기초인 사람들이 이용하는 자유 수영 레인을 이용하는 편이다. 몇 번 수영을 했더니 그래도 자유형에는 자신감이 좀 붙어서 이번에는 바로 옆에 있는 초급 레인을 이용했다.
숨이 부족해서 레인의 가장 앞, 뒤에서 쉬는데 내가 경로 방해를 했나 보다. 어떤 아저씨가 계속 불편한 표정으로 보다가 말을 했다.
“가운데에서 있으면 안 돼요. 턴을 해야 하는데 못 하잖아요.”
그 말을 듣는데 갑자기 기분이 확 나빠졌다. 기분 나쁠만한 일도 아닌데, 기분이 나빠졌다. 그래서 다시 자유수영 레인으로 가서 천천히 수영을 했다.
나는 왜 기분이 나빠졌을까?
이건 나의 고정관념일 수도. 성급한 일반화일 수도. 근데 일단 읽어보세요.
아저씨의 말투가 기분이 나빴다. “~을 하면 안 돼요.” 어떤 규칙 같지만, 가운데에서 쉬면 안 된다는 규칙 같은 건 수영장에 적혀 있지 않다. 눈치로 알아야 하는 암묵적인 규칙이랄까. 이 수영장에 몇 번 오지도 않은 나는 이런 규칙을 알 리가 없다. 새로운 수영장 이용자에게는 공유되지 않는 수영장 규칙을 명령형으로, 그것도 뾰족한 말투로 알게 되는 것은 기분이 좋지 않은 일이다. 분명 똑같은 돈을 내고 왔는데 나는 왜 굳이 굳이 눈치를 보며 혼을 나가면서 새로운 규칙을 알아야만 하는가? 아, 이런 게 바로 텃. 세.라고 하는 것이다. 너 이 수영장을 이용하려면 기존 이용자의 규칙을 눈치껏 빨리 알아와. 이용료를 내도, 완전한 이용에는 그들이 만든 조건이 붙는다.
나는 환대를 매우 중요한 개념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참, 한국 사회는 환대받는 것이 쉽지가 않다. 놀이동산 티켓을 구매했는데, 갑자기 스핑크스가 나타나 수수께끼를 맞혀야만 놀이동산에 들어갈 수 있는 느낌이다. 특히 이 사회에 처음 발을 들인 초심자에게 이 환대는 더더욱 어렵다. 힌트 없는 수수께끼를 풀며 스핑크스의 눈치를 보고 땀을 삐질 흘린다. 그러다 그냥 포기하고 돌아갈 때도 있다. 이미 구매한 놀이동산 티켓을 덜렁거리면서.
처음 수영장을 이용했을 때만 환대받지 못한다는 경험을 한 것은 아니다. 처음 운전을 했을 때도 도로에서 환대받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분명 초보 운전이라고 스티커를 붙였고, 나는 아직 운전이 미숙하다고 표시를 했다. 그런데 도로에서 내가 받은 것은 배려가 아닌 빵, 빵 클락션 소리였다. 초보라 속도가 느리니 끼어들게 하지 못하려고 더더욱 속도를 내고, 우회전 또는 좌회전이 느리면 지체 없이 뒤에서 누군가 클락션을 눌렀다. 클락션 소리에 더 놀라서 사고가 날 것 같았다. 원래 다 그런 거라고 하지만 그냥 운전을 포기하고 싶었다. 처음부터 운전을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치사하고 더러워서 운전을 그만두고 싶었다.
운전할 때 뒤에서 클락션으로 재촉하면 차에서 내리고 싶다. 내려서 소리치고 싶다.
“뭐가 그렇게 급한데요. 그렇게 빨리 가면 뭐가 좋습니까? 어차피 빨간불에 다 같이 걸려서 멈출 건데. 뭐가 그렇게 이기고 싶습니까? 그냥 운전하는 것도 경쟁해야 속이 시원해요? 초. 보. 운. 전.이라고 적혀있지 않습니까? 배려하면 뭐 몸에 두드러기라도 나는 겁니까? “
운전실력이 좀 늘어도 아직도 도로에서 환대받는 법은 미지수다. 사람들은 회사에서도 모자라서 퇴근길까지 운전으로 경쟁을 하는 듯하다. 경쟁이 관성인 사회라 모두가 환대받지 못한다.
그리고 보통, 이렇게 빵. 빵 거리며 화내는 사람은 중년 남성이다. 그들은 나를 째려보고 간다.
어느 날은 이런 일도 있었다. 붕어빵 아저씨한테서 붕어빵을 샀다. 현금을 달라고 해서 돈 계산을 하는데 잠깐 실수를 했다. 따지듯이 아저씨가 금액을 고쳐줬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붕어빵을 기다리고 있는데 어떤 아이가 아저씨한테서 붕어빵을 샀다. 그리고 그 아이한테 내가 실수했던 돈계산을 물어보는 것이다.
어이가 없었다. 뭐야 나 쪽팔리게 하려고 그러는 건가? 싶었다.
고등학생 때 수학 1등급을 놓쳐본 적이 없는데, 단 하나의 실수로 사람을 민망하게 만드는 게 너무 기분이 나빴다.
어느 날은 비행기 체크인을 기다리고 있는데 중년 남성이 쓱 끼어들더니 자신의 가족(자신의 아이를 포함한) 을 불렀다. 앞에 사람이 넷이나 끼어들어 새치기를 했는데도 사과조차 없었다.
어느 날은 월세집을 빼려고 중년 남성인 집주인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계약 기간 전에 집을 뺐다고 나에게 “시끄러워!”라고 소리쳤다. 물론 내가 공인중개사분께 말씀드리고 다음 세입자를 구해서 나갔으며, 그에 해당하는 중개 비용도 내가 다 낸 상태였다.
어느 날은 우리 엄마에게 옆집 사는 중년 남성이 외간 남자를 집에 들인다고 모욕을 줬다. 물론 외간 남자를 집에 들이는 일은 전혀 없었다.
어느 날은 외간 남자라고 불린 중년 남성이 술에 취한 채 우리 집 도어록을 마구 눌렀다. 집을 착각을 했다고 한다. 모르는 사람이었고, 그 이후로 자물쇠를 하나 더 달았고, 나는 밤에 도어록이 눌릴까 가끔 문을 쳐다봤다. 사과는 없었다.
중년 남성이, 중년 남성이, 중년 남성이 나를 혼냈고, 나에게 창피를 주고, 나에게 클락션을 눌리고, 그리고 사과하지 않았다.
수영장에서 아저씨의 말에 기분이 나빴던 건, 그건 나의 고정관념일까, 성급한 일반화일까, 피해의식일까.
다정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다정을 잃지 않으려고 말을 다듬고 뾰족한 부분은 잘 갈아서 사람들에게 둥글게 닿게 하려고 한다.
말의 섬세함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어린아이를 위해 이야기를 만든 카프카처럼 둥글게 둥글게, 내 삶이 피로하고 괴롭더라도 그 마음의 빈곤이 다른 사람에게 뾰족함으로 가닿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삶이 피곤해서, 너무 급해서, 너무 힘들어서 그렇게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고. 이기적이게 바뀔 수밖에 없다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 되어버린 걸까. 나 또한 이런 반복되는 일들에 다정함을 잃어갈까 겁이 난다. 나는 ”~해주실 수 있나요? “라고 부탁하고, 잘못된 부분에는 ”그럴 수도 있지, 괜찮아요 “라고 하고, 끼어드는 차를 기다려주고, 감사한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는데. 다정함이 쓸모없는 재능이 되어버릴까. 그게 참 겁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