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진 잘 하는 멋진 오빠
다음주는 월, 화, 수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벌써 목요일이니 이제 이틀후면 지훈이랑 등산을 가겠구나.. 기대감에 한껏 들뜬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 오늘 스터디는 내가 주관하는 날이라 하루종일 준비로 정신이 없었다. 6시 반부터 스터디 시작이라 대충 이른 저녁을 혼자 때우고 있는데 문자가 왔다. 민지훈이었다.
은수씨. 저녁 먹었어요?
혹시.. 오늘 보자고 말할건가?
지금 먹고 있어요. 오늘 스터디가 있어서 일찍 먹는 중이에요.
몇 시에 끝나요? 그럼 끝나고 차 한잔 마실래요?
늦게 끝날텐데... 9시는 되야 해요 ㅠㅠ
괜찮아요. 그럼 학교 앞 커피번에서 기다릴게요.
아니, 민지훈이야.. 연락을 좀 일찍 줬으면 무슨 핑계를 대든 스터디를 취소했을 거 아니냐... 하지만 지금은 취소하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그래, 취소할 수 없다면 최대한 빨리 스터디를 끝내는 거야!!
결국 나의 열의로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스터디를 진행시켜 2시간만에 끝낼 수 있었고 난 바람처럼 달려 커피번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1층 구석진 곳에 츄리닝 차림의 지훈이가 앉아 있었다. 집에가서 저녁을 먹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차를 몰고 왔다고 했다. 캐주얼 차림도 산뜻하게 잘 어울려보였다. 역시.. 패완얼.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구나. 미남은 뭘 입어도 멋있구나.
커피 두 잔 시켜놓고 마주앉아 특별한 얘기도 하지 않았다. 그냥 하루동안 있었던 얘기, 시시콜콜한 잡담같은 대화를 나눴는데 그와 마주보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가슴 떨리게 좋았다. 그저 좋기만 했다.
"취업 준비는 잘 되요? 원서는 넣고 있나요?"
"네.. 지금 하고 있는 스터디가 취업 스터디에요.. 대기업 위주로 넣어보려구요."
"저도 공채로 들어간 거긴 한데.. 은수씨랑 전공이나 영역이 달라서 도움이 될지 모르겠네요. 아, 신문은 열심히 읽어요. 경제 공부 좋아합니다. 재테크 쪽으로는 도움될지도 모르겠어요."
국가 기관에서 일하는 지훈이는 대학 졸업과 동시에 자동으로 취직이 되었기 때문에 따로 취업 준비를 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렇지만 잠깐만 대화 해봐도 아는 것이 많고 매우 똑똑한 사람 같았다. 스토리 위주의 소설이나 감성적인 에세이만 주구장창 읽어대는 나와는 다른 부류의 독서자 같았다. 뭐 아무튼... 때로는 인간은 나와 너무 똑같기 보다는 다른 면을 가진 상대의 모습에 매력을 느끼고 더 끌리기도 하는 법이니까.
2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커피번의 직원이 우리에게 다가와 곧 마감임을 알려서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11시 밖에 안되었는데... 아쉬웠다. 보통 새벽 1시, 2시에 자는 나에겐 11시는 초저녁 타임이었다.
"집이 어디에요? 데려다 줄게요."
"아... 저는 바로 앞에 살아요. 걸어서 10분이면 가요."
"그래도 너무 늦었는데.. 차로 가면 금방이니까 집 앞에 내려다 줄게요."
어머.. 지훈아.. 사실은 내가 어디 사는지 궁금해서 그런거지?
커피번에서 내가 사는 자취 오피스텔까지는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그렇지만 나는 굳이 지훈이의 호의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11시는 나에게 초저녁이었으므로. 또한 호감 있는 사람이 평일 저녁 퇴근하고 나와 차 한 잔을 마시기 위해 여기까지 왔는데 이 정도의 친절은 베풀어야지...
그러나 역시나 제일 중요했던 이유는 그 사람과 좀 더 오래 같이 있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단 10분, 20분이라도 말이다.
지훈이와 한참을 걸었다. 그 사이 내 자취방도 지나쳐갔다. 나는 차마 여기가 우리 집이라 이만 들어가겠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는 커피번 근처에는 주차할 만한 곳이 없어 대로변 건너편 사설 주차장에 주차를 해두었다고 했다. 15분을 걸어서 주차장에 갔고 주차장 아저씨께 열쇠를 받아 차를 빼는데도 한참이 걸렸다.
지훈이가 차를 빼서 내 옆으로 대며 창문을 내리며 나보고 조수석에 타라고 얘기했다. Suv 여서 문턱이 높았다. 차에서는 향긋한 방향제 냄새가 났고 먼지도 별로 없고 깨끗해 보였다. 그런데... 음? 이게 뭐지? 손잡이에 뭔가 있었다.
"이게 뭐에요?"
"네? 하아... 민지현 진짜... 그거 만지지 말아요."
"뭔데요?"
"주말에 가족 행사 있었다고 했잖아요. 누나가 조카를 데리고 잠깐 내 차에 탓는데 그 때 애 기저귀를 거기다 버리고 내린 것 같아요."
"그럼 이게 기저귀라구요? 몇 일 동안 여기 있었던 거네요. 하하하."
"다행히 쉬인 것 같아요. 큰 거 아니고."
"정말 다행이네요. 깔깔깔"
사설 주창장은 협소했다. 부웅~ 지훈이는 후진으로 차를 뺐다. 왼팔은 운전대를 잡고 오른팔은 내가 앉은 조수석의 헤드 부분을 잡고 상체를 틀어 후면을 보며 운전을 하는데 그 모습이 그렇게 멋질수가 없었다. 오늘은 포마드 크림도 머리에 바르지 않고 옷도 가벼운 트레이닝복 차림이었지만 캐주얼한 모습은 또 그 나름대로의 멋짐이 있었다. 역시 패션의 완성은 얼굴인가 보다. 잘생긴 남자는 무얼 입어도 멋져보이니 말이다.
우리는 조카의 기저귀 덕분에 한참을 같이 웃었고 덕분에 우리를 둘러싼 분위기는 더 훈훈해지고 친근해졌다. 난 자취방의 위치를 그에게 알려줬고 지훈이는 내 얘기를 듣더니 차를 몰면서 커피번이랑 진짜 가까웠네요라며 괜히 본인 때문에 시간만 더 지체한 것 아니냐고 물었다.
"덕분에 지훈씨 차도 타보고 더 좋았는데요. 그런데 운전을 참 잘하시네요. 후진도 그렇고."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지훈이는 내 말을 듣고 그저 피식 웃기만 했지만 난 그가 마음속으로 꽤나 흐뭇해 한다는 걸 그의 표정으로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10분이면 집에 걸어갈 거리를 주차장까지 가서 차를 빼고 다시 신호를 받아 돌아오는 과정으로 30분을 넘게 소요하며 드디어 내 자취 오피스텔 입구 바로 코 앞에 도착하였다.
"오늘 커피도 잘 마셨고 즐거웠어요. 안녕히 가세요."
"운전 잘하는 오빠가 토요일에 데리러 올게. 잘자라, 은수야."
헉! 갑자기 웬 반말? 내 칭찬이 그의 도파민을 너무나 자극했나 보다. 그렇지만 듣기 싫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왜 심장이 갑자기 더 나대고 제멋대로 쿵쾅거리고 난리일까? 스터디로 대충 저녁을 때웠고 빈 속에 라테만 가득 먹어서 그런 걸까? 갑자기 위액이 과다 분출되면서 속이 살짝 쓰리기까지 했다. 집에가서 라면이라도 끓여먹고 자야되나 했지만 입맛도 뚝 떨어졌다. 어느 책에서 봤는데 사랑에 빠지면 입맛을 잃는다더니 내가 지금 그 증상을 앓기 시작했나 보다.
부릉~
손을 흔들며 출발하는 그의 차를 한참동안 쳐다보다 집으로 들어갔다. 속은 살짝 쓰렸지만 고통은 이내 사라졌다. 집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나는 어느 새 슬며시 미소짓고 있었다. 토요일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