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프터 신청
첫 만남 그 이후로 지훈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내 핸드폰은 잠잠하기만 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폴더폰을 수시로 열어보았다. 혹시나 부재중 전화가 왔을까 싶어서.. 혹시나 문자가 오진 않았을까 싶어서.. 그러나 야속하리만큼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그 당시 취업 준비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던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에서, 특히 수업이 없는 공강 시간이나 주말에는 중앙도서관에서 보냈다. 오전에는 기본 상식과 세상 돌아가는 시류를 알기 위해 신문이나 경제 잡지를 읽었으며 오후에는 영어랑 일본어를 잊지 않기 위해 공부했고 저녁에는 취업 스터디에 참여하였다. 차례를 정해 돌아가면서 면접 문제를 준비하였고 실전처럼 묻고 대답해 보는 연습도 하였고 시사에 관련된 토의도 해보았다. 내 전공은 영어영문학이었지만 취업을 위해 2학년때부터는 경영학을 복수 전공했고 틈틈이 일본어도 배워두었다. 그러고 보니 대학 시절을 그저 허투루 보낸 것 같진 않구나.
공과대학 학생들은 4학년 때 대부분 취직이 되는 분위기였다. 취업 기준의 눈이 너무 높지만 않고 학점 관리와 어학도 기본만 되면 이과생들은 여러 기업들에서 장학금까지 주며 모셔갔다. L사, S사, H사 등.. 이름만 들어도 다 아는 그런 국내 굵직한 기업들에서 졸업도 안 한 학생들을 용돈까지 주며 취직시켜 주고 인사 담당 임원들이 직접 학교로 찾아와 합격생들을 따로 불러 근사한 곳에서 밥도 사준다는 얘기가 들려왔을 때 그저 부럽기만 했다. 그리고 이런 대접을 받지 못하는 나의 처지가 조금은 서글퍼졌다.
그래서 나는 대한민국에서 어학 전공인 여대생의 취업의 문이 얼마나 좁은지 실상을 온몸으로 느끼며 연봉보다는 여자들이 가기 좋은 기업을 찾기 시작했다. 급여는 많지 않아도 근로 환경과 복지가 잘 갖춰진 회사를 찾아보았다. 여러 대기업 계열사들 중에 한 두 곳은 여자들이 가기 좋은 곳이 있긴 있었다. 회사가 크진 않아도 탄탄한 기업 위주로 복지가 좋은 곳을 대충 추려보니 20곳 정도 되었다. 이 회사들에 차례로 취업의 문을 두들겨 볼 생각이었다.
관심 있는 분야는 해외영업파트. 영어를 전공했고 아직은 미천한 실력이지만 일본어도 간단한 의사소통은 되는 수준이니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또한 경영도 복수 전공하지 않았는가! 일단 취직만 된다면야 거기서 내 능력을 마음껏 발휘해 볼 생각이었다.
집에서는 대학원 얘기도 꺼내셨지만 더 이상 공부는 하기 싫었다.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재수 1년에 대학 4년까지 11년을 대학입시, 취업 입시에 바쳤는데 이젠 그만하고 싶었다. 당당히 사회에 나가 경제활동을 하며 돈도 벌고 싶었다. 내가 배운 걸 실전에서 써먹어 보고도 싶었다.
그렇게 야심 차게 계획적으로 취업을 위해 열심히,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 지훈이를 만났는데.. 첫눈에 반한 그 사람한테서는 연락이 없고.. 갑자기 모든 게 실망스러워져 속상한 마음에 이틀 동안 학교도 가지 않았다. 오피스텔에 누워 잠만 잤다. 스터디 멤버들은 어디 아프냐며 왜 나오지 않는지 계속 연락이 왔다. 답장도 일절 하지 않았다. 모든 게 귀찮아졌다.
그와 헤어지고 3일째 되는 날은 토요일이었다.
'아.. 주말까지 연락이 없다니.. 정말 애프터는 없는 모양이구나. 끝났어. 다시 보긴 힘들겠다. '
주변 선배들과 친구들이 항상 하던 말이 떠올랐다.
"먼저 연락 없는 남자는 만나지도 마. 여자만 불행해져."
"남자가 좋아해서 사귀어야 여자는 행복한 거야."
"여자가 더 많이 좋아하면 결과가 어떤 줄 아니? 그 여자는 점점 힘들어진다."
뭐, 좋은 말들은 없었다. 쳇, 여성은 주체적으로 누군가를 먼저 좋아하면 안 되는 건가? 아니다. 여성도 마음에 드는 이성을 선택할 자기 결정권이 있지. 그런 의미에서 내가 먼저 지훈에게 문자를 보내보는 건 어떨까?
하루에도 핸드폰 폴더를 열었다 닫았다, 화면에 글자를 썼다 지웠다를 수없이 반복하였다. 바로 연락해 보는 건 너무 들이대는 것 같으니 딱 일주일만 기다렸다가 안부 겸 문자로 보내보기로 했다. 그래, 일주일 뒤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으면 깨끗이 접자!
그러나 주말을 견디기엔 시간이 너무 많았다. 스터디도 주말은 쉬는 날이라 마땅히 공부할 것도 없었다. 도서관 시청각실도 토요일은 오전만 문을 열었고 일요일은 아예 운영하지 않아서 어학 공부 겸 영화를 보려고 했던 나의 계획도 무산되고 말았다.
나연이 집에라도 가볼까 싶어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은수야!"
"나연아, 어디야?"
"(시끌시끌) 나 밖이지.. 무슨 일 있어?"
"아니, 일은 무슨.. 그냥 심심해서 전화했어. 지금 바빠?"
"어, 여기 친구들하고 같이 있어."
아... 나연이도 오늘 밤에는 못 보겠구나...
"알았어. 일 봐."
"왜? 설마 너 지금 이 시간에 혼자야?"
"응, 혼자 있어."
"그 소개팅남은? 안 만나?"
역시 나연이는 내 속을 꿰뚫어 보는 귀신이었다. 아니, 도사급인가?
"연락이 와야 만날 거 아니야."
"뭐야, 애프터 없었어? 와, 너무 하네!! 걔 눈깔이 삔 거 아니니?"
"이상해.. 분명히 만날 때 분위기는 좋았었거든."
"그래? 걔 선수인가? 야야 연락 없으면 그냥 관둬. 내가 좋은 사람 있나 찾아볼게."
나연이와 통화를 하고 나면 뾰족한 해결책이 생기는 건 아니지만 항상 마음에 위안을 얻으며 전화를 끊게 된다. 그래서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일찌감치 집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가는 도중 근처 슈퍼마켓에서 과자며 라면, 아이스크림, 과일까지 잔뜩 샀다. 내일은 집 밖으로 나가지 말고 집에서 냉장고 파먹기를 해야겠다. 현관에 들어서며 손도 안 씻은 채로 읽을 책부터 골라 잔뜩 쌓아둔다.
징징징 징징~
진동으로 해 둔 휴대폰이 요란스럽게 마구 울리기 시작한 건 일요일 늦은 오후 해가 막 질 무렵이었다. 오랜만에 늦잠을 퍼지도록 자고 하루종일 집에서 뒹굴거리면서 먹은 과자 봉지며 아이스크림 껍질이 나와 함께 물아일체 된 여유롭다 못해 게으르고 지저분한 주말 끝자락. 보통 이 즈음엔 본가에서 아버지가 전화를 주실 시각이었다. 나는 위로 오빠가 한 명 있었는데 우린 둘 다 대학을 타지로 가게 되어 집에서는 일요일 이 시간엔 항상 자식들에게 안부 전화를 돌리시곤 했다.
"아.. 귀찮아..."
나는 바닥에 드러누워 있다가 겨우 상체만 일으켜서 고무줄로 떡진 머리를 대충 묶고는 마지못해 전화를 받는다. 머리카락에 붙은 과자 부스러기 몇 개가 내 옷으로 떨어지고 나는 다시 그걸 손으로 털어 굳이 바닥으로 떨어뜨린다. 집구석이 마치 돼지우리이며 나는 그 속에서 하루종일 사육당한 것 같은 한심한 생각이 든다.
"응, 아빠."
"......"
"아빠? 여보세요."
"저.. 은수 씨 폰 아닌가요?"
옴마마마마! 웬일이니 웬일이니!!!!
이 목소리는 아빠가 아닌데!!!!
그제야 제대로 발신인 확인도 안 하고 무작정 전화받은 게 생각났다. 너무 놀라 얼른 휴대폰을 귀에서 떼고 화면을 확인했다. 뭐야!!! 민지훈이잖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리고 첫 만남 때 그랬던 것처럼 온몸에 힘이 쭉 빠지고 다시 손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대답을 해야 되는 머릿속이 마치 텅 비어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담배를 피워본 적도 없지만 아마 피웠다 끊은 사람이 겪는 금단현상이란 이런 것이겠지? 후아후아후아. 깊이 심호흡을 하고 대답을 해본다.
"흠흠..(괜히 헛기침)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집에서 온 전화인 줄 알고 발신 확인도 제대로 안 하고 받았어요."
"잘못 건 줄 알고 놀랐네요."
"저 맞아요."
"지난주에 계속 일이 많아서 너무 바빴어요. 어제는 집안에 행사가 있어서 연락 못했고요. 오늘은 뭐 했어요?"
발로 과자 부스러기를 모으며 차분이 들뜨고 설레는 마음을 가라앉혀 본다.
"아... 오늘 하루종일 집에 있었어요. 그냥 푹 쉬었어요."
"지금 보기엔 너무 늦었죠?"
"네? 아, 네.. 그렇죠.. 해가 거의 졌어요."
(아니요! 전혀 안 늦었어요!)
사실 속 마음으로는 지훈이가 너무나도 보고 싶었다. 차마 입 밖으로 저 말은 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이제 날이 많이 풀렸는데 다음 주에 나랑 같이 등산 가요. 토요일에 데리러 갈게요."
"등산이요?"
"네! 혹시 등산 싫어해요?"
"어머, 아니요. 그럴 리가.. 저 산 완전 잘 타요."
"잘 됐네요. 그럼 다음 주에 봐요."
사실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게 등산이었다. 정상에 가는 것 이외에는 딱히 뚜렷한 이유도 목적도 없이 그저 오르막을 끝도 없이 올라갔다 내려오는 게 너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기본 체력이 그리 좋지 못한 나는 산에 오르면 너무 무리가 됐는지 머리가 어지러운 적이 많았다.
그러나 상대가 민지훈인데!! 그깟 어지러움이 문제겠냐며!! 갑자기 등산이 내 유일한 취미가 되었다.
꺄아아아아악!!!!!
됐다, 됐어. 드디어 애프터 받았다!! 문자도 아니고 바로 전화가 오다니! 이건 뭐 확실한 의사표현 아닌가? 나 너한테 관심 있다. 곧 만나자! 이거지. 역시 민.지.훈! 너 맘에 든다. 박력있는 남자였어! 이제 다음 데이트 잡았으니 게임오버. 은수야, 앞으로 너 하기에 달렸다!!
벌떡 일어나 쓰레기장 되기 일보직전의 방안을 싹싹 치우고는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갔다. 마음만 먹으면 이리 깨끗이, 순식간에 끝내버리는 청소인 것을... 주말 내내 왜 그리 지저분하게만 해놓고 지냈을까... 그건 아마도 내 마음의 문제였겠지. 바라던 바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의 불안과 실망감이 나를 무력하고 한없이 가라앉게 만들었던 거였으리라.
그렇지만 이제 상황은 변했다. 1분 남짓의 통화만으로도 이렇게 설레고 가슴 뛸 수가 있는 거구나. 이렇게 벅찰 수도 있는 거구나. 종량제 봉투를 수거함에 가볍게 던져 넣고는 동네 한 바퀴 돌다 올 생각이었다. 3월의 공기는 아직 차가웠지만 나에겐 그저 상쾌하게만 느껴졌다. 두 뺨에 닿는 봄바람이 보드랍고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저녁 산책이었다. 집 앞 벚나무 가로수들이 잔뜩 부풀어 오른 꽃망울을 가지마다 한 움큼씩 끌어안고 서 있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