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민지훈이라고 합니다. 은수 씨 많이 기다리셨나요? 미안해요. 오늘 퇴근하는데..."
무언가 본인이 늦은 것에 대한 변명을 하는 것 같았는데 지훈이의 목소리는 점점 더 희미해지더니 내 귀엔 어느새 한 마디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 사람의 목소리뿐만 아니라 퇴근길 혼잡한 도로의 자동차 소음 소리도, 길거리의 다른 사람들 얘기 소리도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저 심장은 철렁했고 머릿속은 텅 빈 상태로 입을 조금쯤 헤 벌리고 지훈이의 얼굴을 빤히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괜찮아요. 퇴근 시간 딱 맞추는 게 어디 쉽나요?"
연신 미안하다는 지훈에게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라는 뉘앙스를 확실하게 풍기며 근처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같은 과 동기가 추천한 분위기 좋은 파스타 집이었다.
"여기 뭐가 맛있나요? 날이 좀 쌀쌀한데 와인도 한 잔씩 시킬까요? 술 마실 수 있어요?"
"네, 마실 수 있어요."
술 마실 수 있냐니... 없어서 못 마시지... 자취방 냉장고에 물은 없어도 맥주는 꽉꽉 채워놓는 나였다. 그렇지만 '잘' 마신다는 얘기는 쏙 뺐다. 첫 만남인데 요조숙녀 이미지로 그에게 그저 잘 보이고만 싶었다.
지훈이는 가게 매니저의 추천을 받아 여기서 제일 잘 나간다는 파스타와 피자를 시켰고 샐러드와 하우스 와인도 2잔 주문했다. 신촌은 자주 오지 않는다는 걸 보면 이 식당이 분명 처음 와보는 식당일 텐데도 지훈이가 음식을 시키는 모습은 내 눈엔 꽤 매너 있고 능숙하게 보였다. 이런 여유는 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나이는 어리지만 사회생활을 이미 시작한 사람이라 그런 걸까? 아직 사회 초년생일 텐데... 아니면 어릴 때부터 이런 식당에 자주 가보며 누린 사람이라 그런 걸까? 동율 선배를 통해 듣기론 부유한 집안의 막내아들이라고했으니 형, 누나 사이에서 보고 배운 것도 많겠지... 맞은편에 앉아있는 지훈이를 두고 머릿속으로 그에 대한 온갖 추측과 상상의 나래를 펼쳐만 갔다.
배는 고팠지만 전혀 허기짐이 느껴지지 않았다. 주문한 음식이나 식당 분위기 따윈 이미 내 관심사가 아니었다. 나의 모든 신경은 오로지 본인 얘기를 하다가 또 적당한 시기에 나에게 질문을 던지는 잘생긴 민지훈에게만 가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지훈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는 못했다. 또 그가 묻는 말에 어버버 거리기만 할 뿐 야무지게 대답하지도 못했다. 그와 함께한 그날의 매 순간이 너무나 떨렸기 때문이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갓 나온, 모시조개가 듬뿍 들어간 봉골레 파스타를 먹을 때 잡고 있던 포크가 미세하게 떨릴 정도로 난 그렇게 떨었다. 학생 신분으로는 비싸서 자주 마시지 못하는 와인을 마시기 위에 와인잔을 잡았을 때도 두 손으로 잡아야 될 만큼 손이 떨렸다. 지훈에게 떨리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덤덤한 표정을 지어 보이려 애썼다. 그 사람이 무언가를 물어보면 대답하는 목소리가 자꾸 떨려서 일부러 단답형으로 짧게만 대꾸했다.
지훈이는 나에 대해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호구 조사는 많이 하지 않았다. 그전에 만났던 소개팅 남들과는 살짝 달랐다. 형제가 몇이냐, 부모님은 어디 사시냐 정도만 물어봤을 뿐 나머지는 다 나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만 물어보았다. 학교 수업은 재밌냐, 4학년이면 졸업반인데 취업 준비는 잘 돼 가냐, 주로 어디에서 공부하며 혼자 자취하면 밥은 잘 챙겨 먹냐는 주로 그런 질문들이었다. 반면에 나는 지훈에게 질문을 하나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나중에 지훈이가 나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처음 만난 날, 너는 나에게 왜 그렇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느냐고... 분명 얼굴은 본인에게 관심이 많은 표정이었는데 정작 아무것도 묻지 않아서 의아했다고 말했었다.
"관심이 없었던 게 아니라.. 너무 떨려서 아무것도 못 물어본 거야. 대답도 짧게 겨우겨우 했는데 뭘 물어보고 말고 할 정신이 어딨어!"
식당을 나오기 전에 잠시 화장을 고치러 화장실로 향했다. 세상에나!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은 새빨간 홍당무가 되어 있었다. 꽃샘추위 속에서 떨다가 따뜻한 식당으로 들어와 와인까지 마셨으니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던 것이다. 촌스럽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이 몰골로 지훈이 앞에 앉아서 여태 파스타 먹고 와인 마셨던 거니!!! 은수야, 정신 차려라!!! 여자는 미모가 중요한데 어쩌니... 이래 가지고 애프터 신청이나 제대로 받을 수 있겠니... 나는 가방에서 팩트를 꺼내 피부가 하얗게 들뜰 정도로 얼굴에 마구 분칠을 했다.
"커피 한 잔 마실까요?"
내가 화장실에 간 사이 지훈이는 결제를 마치고 가게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 저.. 그럼 커피는 제가 살게요."
그날 아, 어, 저, 그.. 등등의 불필요한 추임새를 얼마나 많이 썼는지 모른다. 아마 내가 바보 같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지금이야 오후 5시 이후로 커피를 마시면 잠을 못 자서 카페인 섭취를 가려 하지만 23살과 24살의 젊디 젊은 청춘들은 저녁 늦은 시각에도 커피를 즐겼다. 신촌에 늦게까지 하는 커피숍이야 차고 넘쳤다. 우리는 파스타 집 근처의 대형 커피숍으로 들어갔고 지훈이는 아메리카노, 나는 라테로 주문을 넣었고 진동벨이 울리자 지훈이 커피를 가져다주었다. 그런데 내가 막 커피를 한 입 마시려는 순간, 생각보다 머그잔이 무거웠고 손을 살짝 떨면서 쥐고 있던 컵을 그만 놓쳐버렸다.
다행히 머그잔이 깨지진 않았지만 안에 있던 내용물은 모두 쏟아지고 말았다.
"은수 씨! 괜찮아요? 뜨거운 건데... "
"아.. 미안해요. 데인 곳은 없어요. 괜찮아요."
지훈은 휴지를 가져와 내 옷이며 테이블을 대충 닦아주었고 다시 커피도 주문해 주었다. 직원을 불러 테이블을 한 번 닦아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서울 토박이라더니 다정하고 친절하고 매너도 참 좋구나.'
그 사람의 행동에도 반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커피숍에서 1시간쯤 시간을 더 보내고 함께 나와 지하철 역 근처에서 헤어지기로 했다.
"안녕히 가세요. 오늘 즐거웠습니다."
음? 뭐야? 이게 끝이란 말인가? 아까의 다정함은 온데간데없고 너무나 형식적인 인사만을 던진 채 지훈이는 지하철역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내 경험상 보통 '다음에 봐요' 라든가 '연락드릴게요'를 붙어야 상대방이 마음에 들었다는 표시인데... 안돼!! 내가 별로 마음에 안 들었나 봐... 어떻게 해... 이런 똥멍청이! 너 오늘 대체 뭘 한 거냐... 이렇게 첫 만남을 망치다니!!
신촌역에서 내 자취 오피스텔까지는 걸어서 10분 남짓 걸린다. 오늘의 짧은 만남이 너무나 아쉬워 나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집에 잘 도착하셨나요?' 신촌에서 서초까지 지하철로 10분 만에 도착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지만 예의상으로라도 지훈에게서 문자를 받고 싶었다. '아직 지하철이에요. 가고 있어요. 잘 자요~'
감미로운 목소리의 성시영이 2005년부터 라디오 dj를 맡으며 '잘 자요'가 그의 전매특허가 됐지만 나에겐 그보다 일찍 지훈이의 '잘 자요'가 있었던 셈이다. 잘 자라는 그 말은 순도 100%의 달콤한 솜사탕 같은 따뜻하고도 평범한 인사말이지만 누가 해주느냐 따라 의미 부여가 달라지는 특별한 말이기도 하다. 이건 분명 그가 내게 보내는 호감의 신호임이 확실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나의 그런 확신과는 달리,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지훈에게서는 아무 연락이 없었고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나의 기대는 점점 실망으로 바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