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 10일 자정의 기록
오늘은 늘 그랬지만, 오랜만에 의식의 흐름대로 일기를 써보려고 한다.
최근에는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나날들이 지속되는 와중에 야외 활동을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이 생긴 탓에 더위를 직격타로 맞아버렸다. 안 그래도 환경 변화에 민감하고 스트레스(긴장)로 적응력이 떨어져서 구역질이 자꾸만 나온다. 오심이라기보단 그냥 구역질이 나온다. 속이 매쓰껍거나 그런 것도 있겠지만, 그건 만성적인 역류성 식도염과 기능성 소화 장애 때문이리라. 최근에 과식을 해서 그런 것도 한 몫 하겠지만 나름 버틸 만한 듯 하면서도 그렇지 않다.
이런 모순이 다 있나.
그러고 보니, 최근에 읽고 싶은 책이 생겼는데 그건 바로 양귀자 작가의 <모순>이라는 작품이다. 필사할 거리를 찾다가 우연히 알게 된 이 작품 속 명대사는 바로 이거다.
“나의 불행에 위로가 되는 것은 타인의 불행뿐이다. 그것이 인간이다. 억울하다는 생각만 줄일 수 있다면 불행의 극복은 의외로 쉽다. 상처는 상처로밖에 위로할 수 없다.”
자신의 불행에 위로가 되는 게 타인의 불행이라는 말을 보자마자 나는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며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선악 유무를 떠나서 원래 인간은 그런 인간이다. 인간의 이기적인 면모든 이타적인 면모든 그런 걸 다 떠나서 우리는 타인의 불행을 보며 위안을 얻는다. 지금 당장 인터넷 커뮤니티만 봐도 그렇다. 자신의 삶이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들끼리 모여 서로의 불행함을 자랑하듯이 얘기하며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지 않나. 그게 나쁘다는 것도 아니고 선하다고 하는 것도 아니다. 애초에 나는 그런 걸 시비선악 가리고 싶지도 않다. 저것은 자연의 진리이자 사실이기 때문이고, 원래 이런 건 선악과 무관계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한(억울함)과 화(분노)라는 감정이란 게 있는 이상 우리는 일체개고할 수밖에 없다.
일체개고는 불교 용어로, 무상함과 무아를 깨닫지 못하고 영생에 집착하여 온갖 고통에 빠져 있음을 뜻하는 말이다. 즉, 자연과 인생은 덧없고 자신이란 존재는 그리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깨닫지 못하고 영원히 살아가는 것에 집착해서 인생은 고통의 연속이라는 말이다.
확실히, 이 일체개고라는 말은 무지하고 무식한 내게 잘 어울린다. 자연과 인생이 덧없다는 말은 너무하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존재가 좀 더 돋보여서 특별해 보였으면 좋겠고, 영원히 살아남고 싶은 어리석음을 신념 하나로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라도 독하게 살지 않으면 이 정신나간 세상을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정신나간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정신이 나가야만 하는 우리의 현실에서 현명한 해답이란 무언가 없을까. 구원이란 진정 없을까. 아, 우리는 자아 실현이 본능적으로 목표를 하고 살아가는 것인데, 그게 진정 무슨 뜻인지 나는 아마 오랫동안 깨닫지 못하지 않을까. 하지만, 이런 것 또한 깨달을 듯 말 듯 해서 언젠가는 깨닫는 날이 오겠지.
나는 사실 속세에 지쳐 차라리 중이 되고 싶다. 어리석은 중생에서 벗어나고 싶다. 나도 석가모니의 보리수나무 아래서 깨달음을 얻으면 이 고통과도 작별인 걸까. 문득 그런 생각을 작년과 같이 또 하고 만다.
인생의 덧없음은 글을 쓰며 깨달은 것 같다. 아니, 이미 깨닫고 있었다. 인생은 덧없다. 길에서 지나가는 노인들을 보며 나는 생각한다. 늙으면 왜 이렇게 비극처럼 보일까. 분명 이건 나의 지독한 비관론자의 기질이 발현하는 것이리라.
나는 모든 인간들의 귀에서 내 말로 피가 흘렀으면 좋겠는 염세주의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