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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월 Aug 26. 2024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 필사 및 감상 1

기억이란 참 이상하다.

기억이란 참 이상하다. 실제로 그 속에 있을 때 나는 풍경에 아무 관심이 없었다. 딱히 인상적인 풍경이라 생각하지 않았고, 열여덟 해나 지난 뒤에 풍경의 세세한 부분까지 기억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솔직히 말해 그때 내게 풍경 따위 아무래도 좋았던 것이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그때 내 곁에서 걷던 아름다운 여자에 대해 생각하고, 나와 그녀에 대해 생각하고, 그리고 다시 나 자신에 대해 생각했다. 뭘 보고 뭘 느끼고 뭘 생각해도, 결국 모든 것이 부메랑처럼 나 자신에게 돌아오고 마는 나이였다. 게다가 나는 사랑에 빠졌고, 그 사랑은 나를 몹시 혼란스러운 장소로 이끌어 갔다. 주변 풍경에 관심을 기울일 마음의 여유 같은 건 아예 없었다.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1


기억에 관한 '나'의 생각은 놀라울 정도로 평소의 내 생각과 비슷했다. 그닥 인상깊다는 느낌도 못 받은 곳에서의 기억이 가끔 떠올려지곤 한다. 그리고 지금 나도 스무 살이고, 사랑하는 연인이 있지만 모든 질문이 결국 나 자신에게로 되돌아온다. 우울증이나 불안장애 같은 게 아직 완치되지 않은 나에게는 이러한 일들이 매일 일어난다. 


기억도, 감정도, 마음이라는 어떠한 것도 전부 신경학적인 뇌의 활동이자 우리 몸의 화학 반응의 일부분이라고 자각하게 되는 순간 나는 과연 어떤 존재인지 집착하게 되고 고뇌에 빠지기 일쑤였다. 그 순간은 뭔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서 괴롭지만 이상한 우월감 비슷한 게 느껴져서 헤어나오기 쉽지 않은, 그런 이상한 기기시감 같은 것들이 느껴진다. 


생각을 복잡하게 하고 자꾸만 간단 명료하게 생각하지 못하는 태생도 있겠지만 나는 <노르웨이의 숲> 장면 중 아래의 '나오코'라는 인물에게 이상한 공감이 갔다. 



"하지만 아무도 그 우물을 찾을 수 없어. 그러니까 제대로 된 길을 벗어나면 안 되는 거야."

"절대로 안 벗어날래."

나오코는 호주머니에서 왼손을 빼내 손을 잡았다. "하지만 괜찮아. 넌, 너는 아무런 걱정도 할 필요 없어. 어둠 속에서 아무리 헤매고 다녀도 절대 우물에 빠지지 않아. 그리고 이렇게 너랑 같이 있는 한 나도 우물에 빠지지 않아."

"절대로?"

"절대로."

"그걸 어떻게 알아?"

"난 알아. 그냥 알아." 나오코는 내 손을 꼭 잡은 채 말했다. 그러고는 잠시 입을 다물고 걷기만 했다. "난 그런 건 굉장히 잘 알아. 무슨 논리 같은 게 아니라. 그냥 알게 돼. 지금처럼 너랑 이렇게 손을 꼭 잡으면 하나도 안 무서워. 어떤 어둡고 나쁜 것도 나를 끌어들이려 하지 않아."

"그러면 간단한 얘기네. 계속 이렇게 손을 잡고 있으면 되잖아."

"그거,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당연히 진심이지."

나오코는 멈춰 섰다. 나도 멈춰 섰다. 그녀는 두 손을 내 어깨에 올리고 가만히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눈동자 깊은 데에서 검고 무거운 액체가 이상한 도형을 그리며 소용돌이쳤다. 그렇게 아름다운 눈동자 한 쌍이 한참이나 내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다음 그녀는 까치발을 하고서 내 볼에 살짝 볼을 댔다. 순간, 심장이 멈춰 버릴 것만 같은 따스하고 매혹적인 몸짓이었다.

"고마워." 나오코가 말했다.

"별말씀을."

"네가 그런 말을 해 줘서 정말 기뻐. 정말." 그녀는 슬픈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는 안 돼."

"왜?"

“그래서는 안 되는 거니까. 그건 너무 심한 일이니까. 그건······.”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말고 나오코는 입을 꾹 다물더니 그대로 걸어갔다. 온갖 생각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휘감고 돈다는 것을 알고, 나 또한 더는 말을 걸지 않고 그 곁을 묵묵히 걸었다. 

“그건 올바르지 못한 일이야, 너에게나 나에게.” 한참이나 지난 후에 그녀는 덧붙였다. 

“어떻게 올바르지 못한 건데?” 나는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누군가를 영원히 지켜 준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잖아. 그렇지? 만약, 만약에 말이야, 내가 너 하고 결혼했다고 해 봐. 넌 회사에 갈 거잖아. 그럼 그동안은 누가 나를 지켜 줘? 네가 출장이라도 가 버리면 도대체 누가 나를 지켜 주겠어? 내가 죽을 때까지 너에게 달라붙어 따라다녀야 해? 그건 너무 불공평하잖아. 그런 건 인간관계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다 언젠가는 나한테 넌더리가 나고 말 거야. 내 인생은 대체 뭐지, 이 여자를 돌보기 위해 태어난 거냐면서. 난 그런 거 싫어. 그런 걸로는 내가 끌어안은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

“이런 상태가 평생 계속되는 건 아니야.” 나는 그녀의 등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언젠가는 끝나게 되어 있어. 그게 끝나면 같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면 돼. 앞으로 어쩌면 좋을지. 그때가 되면 혹시 네가 나를 도와줄지도 몰라. 우린 수지 타산을 해 가며 살아가는 게 아냐. 만일 네가 지금 나를 필요로 한다면 그냥 편하게 사용하면 되는 거야. 그렇잖아? 왜 그렇게 모든 걸 어렵게 생각해? 있지, 어깨에서 힘을 좀 빼 봐. 너무 어렵게 생각하고 긴장하니까 모든 걸 그렇게 보는 거야. 어깨에서 짐을 내리고 모든 걸 가볍게 생각해 봐.”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나오코는 무서우리만치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목소리에 내가 무슨 잘못된 말을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지?” 나오코는 발아래 땅바닥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말했다. “어깨에서 힘을 빼면 몸이 가벼워진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알아. 그런 말을 들어 본들 아무 소용없어. 무슨 소린지 알겠어? 만일 내가 지금 어깨에서 힘을 빼면, 나는 산산조각이 나고 말아. 난 옛날부터 이런 식으로 살아왔고, 지금도 이런 식으로밖에 살아갈 수 없는 거야. 한번 힘을 빼고 나면 절대 원래대로 돌아가지 못해. 그걸 왜 몰라? 그것도 모르면서 어떻게 나를 보살펴 주겠다고 말할 수 있는 거야?”

나는 입을 다물었다. 

“나는 네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아주 심각한 혼란에 빠졌어. 어둡고, 차갑고, 너무 혼란스러워······. 저기, 그때 왜 나랑 잤던 거야? 나를 왜 가만 내버려 두지 않은 거야?”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2


나오코의 말은 내게 많은 반성을 하게 만들었다. 나도 평소에 사랑하는 연인과 같이 있을 때 저런 이야기를 하곤 하는데, 그 말이 혹여 상대방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 장면이 아닐까 싶다. 나오코는 나와 같이 모든 걸 어렵고 복잡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주인공인 '나'는 나오코와 나에게 인생이란 수지 타산을 해 가며 살아가는 게 아님을 말해준다. 어찌 됐든, 주인공 '나'와 나오코의 대화는 마치 나와 그와의 대화를 연상케 했다. 그래서 이유 모를 눈물이 나왔던 것이 아닐까. <노르웨이의 숲>의 결말을 대충 알고 있는 나는 울 수밖에 없었던 것도 있겠지만, 나도 자세한 결말의 내용은 아직까지 모르기에 알 수 없는 무언가라고 생각하고 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그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나에게는 애틋함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애틋함. 그것은 사랑을 한다면 느낄 수밖에 없고, 사랑에서 가장 중요한 감정이 아닐까. 하지만, 나오코에게서는 애틋함이란 전혀 찾아볼 수 없기에 주인공 '나'는 다음과 같은 회상과 함께 이렇게 말을 한다.

 


아주 오래 전, 내가 아직 젊고 그 기억이 더욱 선명했을 때, 나는 몇 번이나 나오코에 대해 글을 쓰려 했다. 그렇지만 그때는 한 줄도 쓸 수 없었다. 처음 한 줄이라도 나와만 준다면 그다음에는 물 흐르듯 쓰게 되리라는 것을 잘 알았지만, 그 한 줄이 아무리 애써도 나오지 않았다. 모든 것이 너무도 선명해서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지나치게 자세한 지도가 자세함이 지나치다는 그 이유 때문에 때로 아무 역할도 못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지금은 안다. 결국 글이라는 불완전한 그릇에 담을 수 있는 것은 불완전한 기억이나 불완전한 생각뿐이다. 그리고 나오코에 대한 기억이 내 속에서 희미해질수록 나는 더 깊이 그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가 왜 나에게 “나를 잊지 마.”라고 말했는지, 지금은 그 이유를 안다. 물론 나오코는 알았다. 내 속에서 그녀에 대한 기억이 언젠가는 희미해져 가리라는 것을. 그랬기에 그녀는 나에게 호소해야만 했다. “언제까지고 나를 잊지 마. 내가 여기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 줘.” 하고.


그런 생각을 하면 나는 견딜 수 없이 슬프다. 왜냐하면, 나오코는 나를 사랑하지조차 않았던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3


주인공 '나'는 1장에서부터 회상하고 있다. 그래서 기억에 관한 이야기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자신이 사랑하는 나오코가 자신을 사랑하지조차 않았다는 말 이전의 회상을 보면 나오코도 주인공 '나'에게 아주 뻔뻔스러운 여자였던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미안해.” 나오코는 말하면서 내 팔을 부드럽게 잡았다. 그리고 몇 번 고개를 저었다. “너를 아프게 하려던 게 아니였어. 내 말에 마음에 두지 마. 정말 미안. 난 그냥 나 자신한테 화가 났을 뿐이야.”

“지금 난 아마도 널 진실로 이해하지 못하겠지. 난 머리 좋은 인간이 아니라서 뭔가를 이해하려면 시간이 좀 걸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 너를 이해할 수 있을 거야. 아마 이 세상에서 널 제일 잘 이해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거야.”

우리는 그 자리에서 멈춰 서서 고요 속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발아래 매미 시체며 솔방울을 발끝으로 굴리기도 하고, 소나무 가지 사이로 하늘을 올려다보기도 했다. 나오코는 재킷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멍한 눈길로 그저 생각에 잠겼다.

“저기, 와타나베, 나 좋아해?”

“물론이지.”

“그럼 내 부탁 두 가지만 들어줄래?”

“세 가지 들어줄게.”

나오코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두 가지면 돼. 두 가지로 충분해. 하나는, 이렇게 나를 만나러 와 준 것에 대해 내가 정말 고맙게 생각한다는 사실을 알아줬으면 하는 거, 굉장히 기쁘고, 정말로 구원받은 기분이야. 혹시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정말 그래.”

“또 보러 올게. 다른 하나는?”

“나를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 내가 존재하고 이렇게 네 곁에 있었다는 걸 언제까지나 기억해 줄래?”

“물론 언제까지나 기억할 거야.”

 .

.

.

“정말로 언제까지나 나를 잊지 않을 거야?” 그녀는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언제까지나 기억할 거야.” 나는 말했다. “내가 어떻게 너를 잊을 수 있겠니.”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4


주인공 '나'는 나오코의 말에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몇 번이고 글을 쓰려고 노력을 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도 짠했다. 그 당시 주인공 '나'는 자신이 어떻게 나오코를 잊을 수 있겠느냐고 말한다. 여기서 '나'는 나오코에 대한 사랑이 진심인 것이 드러나지만 반면에 나오코는 그 사랑에 확신이 서지 않기에 자신을 기억해달라는 부탁을 한다. 이런 나오코의 모습에서 과거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 받고 기다림에 부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지만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나오코와 같은 사람이었다. 물론 지금도 그런 기질이 남아 있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그래서 이 장면에서는 진정한 사랑이란 뭘까. 애틋함이 있어야 확신이 서는 사랑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사랑을 하기 전에는 몰랐다. 애틋함이라는 감정이 무엇인지 몰라서 안 그래도 둔감한 나를 더욱 멍청한 것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애틋함이 진정한 사랑의 뼈대임을 알고 나서는 진심으로 그를 더욱 깊이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작중 나오코의 행적은 어느 날, 요양원에서 지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는데 그만큼 나오코는 많이 병약해져 있었던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나도 병약한 사람인지라 그런 건 굉장히 잘 안다. 


지금, 소름 돋게도 나오코의 말을 인용했다. 인생은 소설이나 드라마 같은 것이 아니고 일체개고의 삶인데 사랑은 인생을 소설이나 드라마처럼 만들기에 사람이 우매해진다는 것은 어쩌면 조심해야 할 어떠한 것이다. 사랑은 이상향의 무언가라서 현실과는 동떨어지게 되는 게 당연한 거지만 우리는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하나의 객체이기에 사랑을 할 때는 조심해야 할 것들이 많다. 하지만 그것을 감수하고 만남을 추구하고 사랑을 하는 게 인간의 심리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누군가의 말을 인용하는 게 필요 없어질 때까지 계속 글을 쓰고 싶다. 문득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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