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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월 Nov 10. 2024

상실의 시대와 우울한 청춘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 나오코에 관하여

우리가 잘 아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은 "상실의 시대"라는 게 원제였다. 이 소설의 줄거리는 주인공 와타나베가 비행기 안에서 비틀스의 <노르웨이 숲>이라는 노래를 들으며 죽은 친구인 기즈키의 여자친구였던 나오코에 관하여 회상하는 것으로 시작이 된다. 내가 이번 글에서 집중하고 싶은 건 주인공인 와타나베가 아닌 '나오코'이다.


나오코는 작중에서 아픔을 가진 인물로 등장한다. 그래서 그녀가 나오는 장면마다 그녀의 대사를 보면 의미심장한 대사들이 많다. 예를 들자면, 이 소설의 초반부에서부터 와타나베와 나오코가 들판을 걷고 있을 때 우물을 보며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나오코는 우물을 기피하며 두려워하지만 와타나베와 같이 손을 잡고 있으면 그 어떠한 나쁜 것도 끌어들이려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와타나베는 그런 그녀를 보고 그럼 계속 이렇게 손을 잡고 있으면 되겠다는 말에 나오코는 기뻐하지만 무슨 까닭에서인지 슬픈 표정으로 "하지만 그렇게는 안 돼."라며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그러고 나서 하는 말은 다음과 같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누군가를 영원히 지켜준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잖아. 그렇지? 만약, 만약에 말이야. 내가 너 하고 결혼했다고 해 봐. 넌 회사에 갈 거잖아. 그럼 그동안은 누가 나를 지켜줘? 네가 출장이라도 가 버리면 도대체 누가 날 지켜 주겠어? 내가 죽을 때까지 너에게 달라붙어 따라다녀야 해? 그건 너무 불공평하잖아. 그런 걸 인간관계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다 언젠가는 나한테 넌더리가 나고 말 거야. 내 인생은 대채 뭐지, 이 여자를 돌보기 위해 태어난 거냐면서. 난 그런 거 싫어. 그런 걸로는 내가 끌어안은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


이 대사에서 나오코가 겉으로는 티가 나지 않지만 외로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매우 회피적인 성격이라는 것도 짐작할 수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누군가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하지만 그것은 남을 위한 배려가 아닌 자기 방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미 주변 사람들의 죽음에 상처를 많이 받은 나오코가 더 이상은 상처받기 싫다는 표현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이를 조금 더 명확하게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은 요양원에 들어간 상태의 나오코가 하는 대사에서 살펴볼 수 있다.


"편지에 썼지? 난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불완전한 인간이라고.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심각하게 아프고, 뿌리도 아주 깊어. 그러니까 만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너 혼자라도 가 줘. 날 기다리지 말고. 다른 여자애랑 자고 싶으면 자고. 내 생각 하면서 망설이거나 하지 말고 당당하게 하고 싶은 대로 해. 아니면 난 너까지 끌고 갈지 몰라. 설령 무슨 일이 있다 해도 그런 것만은 하기 싫어. 네 인생을 가로막고 싶지 않아. 누구의 인생도 방해하고 싶지 않아. 아까도 말했듯이 가끔 만나러 와 주고, 나를 언제까지나 기억해 줘."


앞에서 언급을 하지 않았지만 나오코는 계속해서 와타나베에게 자신을 기억해달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이것이 바로 나오코의 회피적인 성격이 가장 드러나는 부분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와타나베는 나오코에게 사랑을 느꼈지만 나오코는 와타나베에게 사실은 사랑하는 마음이 들지 않았던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현재의 와타나베가 회상을 하며 깨달은 바이기도 하다. 나오코는 무의식적으로 죄책감을 느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자신은 사랑하지 않는데 남자는 계속해서 함께 하자는 말을 하며 와타나베 자신도 모르게 사랑을 표현을 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자신의 아픔과 병이 회복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사실은 '성적인' 호감을 느끼고 있었던 나오코가 일부러 와타나베에게서 정을 떼려고 하는 시도였다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확실한 건 나오코는 아주 위태로운 상태에 놓여 있었고, 자신의 죽음을 어느 정도 직감했기에 회피적인 말들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자신은 불완전한 인간이라며 말하지 않았던 그녀의 결핍(콤플렉스), 사랑하는 이들의 극단적인 선택(죽음)으로 받은 '상실감'(충격)과 상처. 그런 것들이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갔던 것이 아닐까. 이쯤에서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제목을 두 개로 나눴지 추측해볼 수 있다. 원제는 <상실의 시대>로 이는 나오코를 초점으로 두고 생각한 제목이라는 가능성이 있다. 청춘, 젊은 나이에 여러 상실을 경험한 나오코를 통해 현대 젊은이들이 많이 경험하고 있는 아픈 청춘, 우울감, 상실감, 무력감, 공허함 등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반면에 <노르웨이의 숲>은 주인공인 와타나베에 초점을 둔 것이라는 걸 추측해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와타나베가 독일행 비행기를 타면서 듣는 비틀스의 <노르웨이의 숲>은 젊었을 적, 상실의 시대 속 청춘을 회상하는 매개체가 된다. 아마 주인공인 와타나베를 초점에 두고 진행되는 이야기라서 <노르웨이의 숲>이 제목으로 굳어진 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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