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성숙하고 능숙한 모습을 보이고 싶을 거야
기숙학교를 다녔던 고등학생 시절, 나는 온전한 홀로서기를 즐기지 못해 중학생 때의 인연에 집착 아닌 집착을 했었던 거 같다. 그래서 생활에 지칠 때에는 중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에게 편지를 쓰곤 했었다. 지금은 아득해져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사람을 대하는 것이 쉽지 않았던 그 시절의 나는, 친구들은 능숙하게 사귀는 사람들에 대한 동경이 있었고 그 당시의 나의 성격을 사랑하지 못해 늘 표류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런 고민들을 담은 문장들을 꾹꾹 눌러 담아 선생님께 편지를 보냈던 거 같다. 어떻게 하면 힘을 들이지 않고 친구들의 무리 안에 들어갈 수 있을지, 인간관계에서 주눅 들지 않을 수 있을지. 이제와 생각해 보면 지금은 더 이상 하지 않는 고민이 되었다. 너무 오래 바라왔던 성격의 모양으로 지금은 내가 나를 바꿨다는 방증이기도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주변 사람에 대한 집착이나 미련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게 당시에 나만의 인간관계를 꾸려나가는 것에 서툴던 나는, 이제 그 기억조차 희미할 만큼 조금은 능숙한 사람이 되었다.
그때 당시 선생님의 편지를 읽으면서 울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너무 낡은 기억이기에 어떤 내용들이 담겨 있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한 문장은 여전히 기억이 난다.
'선생님은, 시간이 지나도 수줍게 웃는 00 이의 모습을 보고 싶다.'라는 문장
그 문장을 읽었을 때, 나의 수줍은 미소에 대해 생각했다. 그건 아마도 머쓱함일 텐데..라는 생각을 했던 거 같다. 하려고 노력은 하지만 잘하지 못해 스스로를 머쓱해하며 마음속에서 말에 불이 붙이 사람처럼 계속 원을 그리면서 뛰어다닌다. 그걸 표출해 내는 미소였으리라.
그래서 나는 내 수줍은 미소에 대해 점수를 많이 주지 않았다. 어른이 되면 자연스럽게 없어질, 나의 치부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은 객관적인 수치로는 확실히 어른이지만, 그때의 나보다 지금의 내가 나은 점은
상실에 조금은 무뎌지고, 아무것도 성취하지 않은 스스로를 조금은 덜 미워하게 되었다는 점뿐이다.
나이가 들수록 능숙함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한다. 성숙하고 능숙하고 노련한 사람이 되는 것에 대한 동경이 있고 여전히 나 스스로에 대한 어리숙함, 쑥스러움을 느낄 때면 '아 어른되기는 글렀네, 멀었네'라는 생각을 자주 하며 마음속으로 벽을 쿵쿵 때리고는 한다. 어릴 때는 그저 수줍은 미소를 보내며 어수룩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그 나이대에 맞는 순수한 모습이라 평가받을 수 있지만, 점점 나이가 차면 이제 낯설다고 어렵다고 피할 수 없는 것들이 늘어난다.
그렇치만 과연 서투름은 그저 어느 날엔가는 능숙해져야 하는, 성숙하기 전의 과도기이기만 한 걸까?
요즈음에는 서툴고 어리석은 모습은 응원하고 싶은 누군가의 매력이 된다고 생각한다. 서툰 모습이 나오는 이유는, 익숙하지 않지만 그 일에서 무엇이든 해내려는 용기의 표출이 아닐까
그때는 벗어나고 싶었던 나의 수줍은 미소는 여전히 내 어딘가에 남아 익숙하지 않은 것을 대할 때 튀어나올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서투르지 않게, 잘하고 싶은 것은 사랑이다.
아빠에 대한 사랑
나는 여전히 아빠와의 관계에 서툴다.
마음껏 미워하고 싶었으나 상황적으로 안쓰러움도 강해 편하게 미워하질 못했다. 그래서 나는 좋아하진 않지만 사랑한다고 결론 내렸고
여전히 나의 연애든, 사랑의 목적에 아빠와 잘 지내고 싶은 변화된 내가 있다. 성숙하고 안정적인 사랑을 통해 성장한 더 나은 내가, 아빠와 더 잘 지낼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에 대한 열망이 있다.
어쩌다 집에서 단 둘이 대화를 하게 될 때면 긴장하는 나를, 그 서툼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지금의 서툰 나를 사랑해야지
관계에서는 누구나 서툴 수밖에 없고, 기한이 없음에도 숙제처럼 조금은 나은 내가 되기 위해
어리숙하게 아빠를 대하는 나를,
포기하지 않는 나를 나는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