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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청 Nov 13. 2024

D-108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의원면직에 대한 결심은 가족들에게만 알렸고, 주말 동안 마치 출사표를 내던지듯 블로그에 글로 적었다. 그리고 오늘 교감선생님께 처음으로 말씀드렸다. 


  우리 교감선생님... 작년 한 해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셨던, 대놓고 T였지만 본인이 알고 있는 상황 안에서 최선을 다해 해결책을 전해주시려 노력한 교감선생님. 일처리가 정말 깔끔하시다. 냉정한 면모도 있지만 입 가의 주름에서 여태까지의 노고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는 담백한 분.


  원래 오늘 말씀드리려던 것은 아니었다. 학교에 언제 알려야 하지? 내 안에서 시기를 고민하고 있었다. 느낌상 학교를 옮기는 서류를 작성할 때쯤 알리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아침부터 인터넷에서 '의원면직'에 대한 글을 폭탄으로 와다다다 읽었다. 나의 내면은 곧 의원면직 네 글자로 가득가득 채워졌다. 어딘가로 풀어내지 않으면 터져버릴 것 같았다. 바늘구멍이라도 내서 터트려야 했는데 아직 친한 동학년 선생님께도 알리지 못했다.(그러면서 얼굴도 모르는 블로그 이웃들에게 공개를 해버렸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사실을 말하지 못해 마음의 병을 얻었던 옛이야기 속 주인공처럼 입 밖으로 '나 의원면직을 결정했소'라고 떠벌리고 싶었다. 그런 차에 교감실 앞을 지나가다 밖으로 나오는 교감선생님을 뵙게 되었다.


-교감선생님, 저...


-오 00 선생님, 오랜만이야! (만날 일이 별로 없다) 


-다른 학교 전보 공문은 언제쯤 오나요?


-아~그거 한 2주 뒤에 오고 서류는 12월 말에 작성해요. 왜요?


-관련해서 드릴 말씀도 있고..


-그럼 이리 들어와서 이야기해요.


-아, 아니, 바쁘시면 나중에..


-아니에요. 들어와서 이야기해요.


  ... 당장 말씀드리려던 건 아니었는데 지나가다 눈에 띄어 충동적으로 발설해 버린 의원면직에 대한 결심. 교감선생님의 입가의 주름이 순간 매끈하게 펴졌다. 난처한 눈동자. 눈썹과 눈매로만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줄 알았는데 눈동자로도 사람의 감정을 느낄 수 있구나. 처음 알았다. 


  그간 내가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알고 계신다. 그러나 올해는 잘 굴러가지 않았느냐. 학급 운영도 잘하지 않았느냐. 의아해하셨는데...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그만두고 싶은 내 마음을 아실 리 없지. 꽉 닫혀버린 내 마음 덕분에 잘 굴러가는 것처럼 보이는 학급 운영. 민원 한 건 없는 우리 반. 

  지난 16년 동안 교직은 나였고 나는 교직 그 자체였다. 해마다 나를 갈아 넣었으며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하게 조금씩 소진되어 갔다. 단단한 돌멩이인 줄 알았던 나는 사실 점점 닳아지는 지우개였다. 


  다친 마음, 닫힌 마음을 가지고는 더 이상 여기에 있을 수 없었다.


  천직인 줄 알고 살아왔는데 내가 자신에게 가스라이팅이라도 해왔던 것인가. 며칠 동안 의원면직 네 글자만 떠올리면 헬륨풍선처럼 마음이 부풀어 바닥으로 내려올 줄 몰라 당혹스러웠다. 그런데 교감선생님 앞에서 입을 벌리자 아주 조금 눈물이 났다. 무엇에 대한 눈물인지는 모르겠다. 이 직업에 대한 아쉬움은 아니었는데, 스스로에 대한 연민 때문인지, 나를 힘들게 한 사람들 탓인지. 흘렸는데 알 길이 없다. 


  교감선생님께서는 관련 공문을 찾아보신다며 알겠다고 하셨다. 우리의 짧은 면담은 마무리되었고 교감선생님의 뒷모습은 황망해 보였다. 뒤돌아 나가는 나 역시 온몸에 힘이 빠졌다. 상급자에게 이 말을 전하는 모습을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다. 그런 내가 '이제 질렸어요. 다른 일을 해보려고요' 한 마디로 교감선생님을 당황시키며 이야기를 마쳤다. 쌉T인 교감선생님답게 휴직이나 병가를 권유하며 붙잡지는 않으셨다. 굳게 마음먹고 꺼낸 말인 줄 이미 느끼셨을 것이다. 그런 분이라서 더욱 마음에 든다. 불편한 위로도, 귀찮은 회유도 없다. 간단한 수락과 몇 가지의 요청. 교감선생님은 역시 최고다. 일처리에서는. 


  다시 교실로 돌아가는 길, 복도 창문을 바라보며 한참을 서 있었다. 내 안에서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끈 같은 게 툭!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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