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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청 Nov 15. 2024

D-107

A 선생님

  아직까지 친한 동학년 A 선생님께 말씀드리지 못했다. 알려야지, 알려야지 하다가 선생님 얼굴을 보면 몽글몽글 연기처럼 생각이 사라져 버린다. 오늘은... 안 되겠다. A 선생님의 첫째 아들이 수능 시험을 본다고 했다. 이런 중요한 날 잡다한 소식을 전할 순 없지. 나에겐 일생을 뒤흔드는 커다란 사건이지만 다른 사람에겐 어머, 그렇구나! 잠깐 놀라고 마는 사소한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별 일 아니다. 내 인생에서야 내가 주인공이지 다른 이들의 인생에서 나는 행인 1일뿐이다.  


  A 선생님과는 올해로 벌써 3년째 동학년을 함께 하고 있다. 3년이나 얼굴을 보았으면서도 나이를 모르겠다. 몇 살이냐고 내게 물어보신 적은 있지만, 내가 되물어본 적은 없다. 대략 50 언저리쯤 되겠거니, 생각하고 지내왔다. 여러 이야기를 들어보고 퍼즐처럼 짜 맞춘 결과였다. 


  A 선생님은 무척 고우신 분이다. 날씬하고 예쁘시며 그날그날 멋진 코디를 보여주셨다. 때에 맞게 피부과를 방문해 틈틈이 관리를 하신 덕분에 선생님은 굉장히 젊어 보였다. 음, 나도 저렇게 나이 들고 싶다. 예쁜 선생님, 고운 선생님. 급식실에서 전투적으로 밥풀을 헤쳐가며 먹는 나와 달리 웃음을 띠고 아이들에게 골고루 먹어라 귀여운 잔소리를 늘어놓으며 밥을 드시는 선생님. 나는 다른 사람의 눈에 어떻게 보일까? 궁금해졌다.(밥 잘 먹는 선생님)


  선생님께 의원면직 소식을 전해드리면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 아마 깜짝 놀라시겠지. 교감선생님과 마찬가지로 힘들었던 내 모습을 옆에서 자세히 지켜봐 온 분이니까 짐작은 하셨을 거야. 하지만 정말 내던지고 나갈 줄 모르셨겠지. 내년에 학교 옮길 때 같은 학교로 가자고도 권하실 만큼 내게 따뜻하신 분이다. 운전을 잘하지 못하는 나를 늘 조수석에 태워 다니시던 분. 어느 날은 엉엉 울며 전화기를 붙들고 선생님을 찾았던 날이 있었다. 수업 중 갑자기 앞문을 벌컥 열고 도와달라 요청한 적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선생님은 나를 안고 다독여주셨다. 분명 엄마의 느낌은 아니다. 내게 언니는 없어 그런 느낌인지 잘 모르겠지만 엄마와 언니 그 어느매의 살짝 애매한 안락함과 포근함. 교직에서 마음에 맞는 동료교사를 만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마지막 3년을 좋은 분 만나 행운이다.


  A 선생님께 갑자기 감사한 마음이 일렁인다. 아침부터 만든 미술 자료를 급하게 메신저로 보내드렸다. 극 내향인인 내가 유일하게 치댈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다. 수업자료 찾거나 만들어 뿌리기. 그 핑계로 앞문 똑똑 노크해 보기, 안내장 들고 교실 들어가 보기, 수업자료로 말 붙이기. 오늘 만든 건 가을 컬러링 관련 자료였다. 미술 시간에 정해진 수업대로 만들기를 하다 보면 꼭 대충 만들어 내고 농땡이 치려는 아이들이 있다.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그런 친구들을 위한 보충 자료인 것이다. "다 했니? 그럼 이것도 해보렴"


  나는 의원면직을 앞두고 몇 개의 자료를 더 만들게 될까. 


  미술 자료 잘 받으셨냐 물으러 선생님 반에 갔다가 되려 맛있는 커피를 얻어왔다. 커피를 나만큼 좋아하신다. 꼭 하루에 한 잔은 드셔야 정신이 차려진다며, 안 마신 날에는 헤롱거리고 어쩔 줄 몰라하셨다. 내게 주신 커피는 게이샤 원두로 만든 콜드브루. 아니 이 비싼걸? 역시 A 선생님은 굉장히 멋진 분이야. 먹을 것을 나누어 주는 사람은 의인이라 불려도 마땅해.


  그렇게 커피를 받아 총총총 우리 반으로 다시 돌아왔다. 한참 이야기하고 웃었지만 당연히 오늘도 의원면직이란 단어를 꺼내지 못했다. 다음 주에는 꺼낼 수 있을까. 아니, 다음 달에는. 뜨거운 물을 조로록 따라 커피에 섞어 마신다. 깊은 가을 아침, 교실에서 커피를 마시면 교실 냄새와 커피 향이 뒤섞여 독특한 향취가 난다. 이건 어떤 직종에서도 맡을 수 없는 냄새. 교사들만 알 수 있다. 이 냄새도 올 가을이 마지막이겠지. 지금부터 여기에서 하는 모든 것은 교직에서의 마지막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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