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없는 삽질
새벽 5시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아니다. 남편이 맞춰놓은 5시 알람 때문에 잠이 깨버렸다. 연구학교의 연구부장이라 한창 바빴던 남편은 줄곧 새벽 5시에 일어나 한참 업무를 하고 나서 출근했다. 어제가 기다리던, 그러나 마음속으로 내내 미뤄왔던 연구학교 발표일이었다고 한다. 원래 발표 자리에는 기본 정장을 입기 마련인데 하여튼 남편. 청바지에 남색 니트를 입고 나갔다. 애플 제품에 대한 열망은 스티브잡스에게까지 이어진 것일까!
느적거리다 잠든 바람에 보일러도 켜지 않았다. 쌀쌀한 방에서 벌떡 일어나 주섬주섬 이불을 개우다 떠올렸다. 맞다, 오늘은 토요일이었지. 출근 안 해도 되는 날이다. 다시 누워 이불을 바르게 펼쳐 덮었다. 평소라면 아침밥 생각이 뭉게뭉게 떠올랐을 것이다. 귀찮은데 간장계란밥으로 퉁칠까, 어제 남겨놓은 반찬이 뭐가 있더라, 에이 주말쯤은 1일 2식 하면 안 되나... 그런데 의원면직을 결심한 이후엔 오만가지 생각을 한다. 나가면 뭐 하며 먹고사나. 일단 재봉틀로 에코백을 만들어 팔아볼까, 그럼 사업자 등록증을 내야 하고, 스마트스토어를 블라블라... 아냐, 해온 짬이 있으니 교육 관련 전자책을 써볼까. 가지고 있는 학급운영 지식이 너무 아까우니 이걸로 전자책을 써서 크몽에 올려볼까. 아냐 아냐, 일단 몸을 움직이는 알바를 좀 찾아보자.
생각에 생각이 유화처럼 겹쳐진다. 맨 처음 떠올린 생각은 무엇이었는지 잘 보이지 않는다. 오늘도 덕지덕지 덧칠하기만 한 것 같다.
어둑한 방 안을 더듬거려 스마트폰을 잡고 유튜브를 켰다. 한 주 동안 가족들에게 의원면직이란 단어를 끊임없이 내뱉었다. 마치 절대 후회하지 않겠다는 듯이, 이 결심을 무르지 않겠다는 듯이. 그랬더니 구글은 이 정보를 악착같이 수집해 유튜브 알고리즘에 대대적으로 깔아놓았다. 온갖 공무원 의원면직, 40대 퇴직, 대기업 퇴직에 대한 영상이 수십 개 떠있다. 클릭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어그로성 썸네일. 썸네일만 봐서는 마치 퇴직하고 다 망한 것 같기도 하고, 백억 부자가 된 것 같기도 하지만 정작 살펴보니 그들의 일상은 적당히 불안했고 소소하게 행복했다.
유튜브 알고리즘은 마냥 환상만을 심어주진 않았다. 꼭 퇴직해서 행복을 되찾으라는 영상이 절반, 무작정 퇴직하면(그것은 바로 나) 힘들 테니 각오하라는 영상이 절반, 그리고 퇴직하니 정말 후회된다는 영상이 아주 조금의 비율로 떠 있었다. 가까운 주변에 의원면직을 한 교사가 한 명도 없어 조언을 들을 길이 없지만 AI시대에 유튜브 알고리즘이 적절하게 나를 채찍질도 해주고 도닥거려주기도 하는 것이다. ‘밖으로 나가면 환상적일 것 같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 무턱대고 기대는 하지 말어’
소속이 없어진다는 건 무엇을 뜻하는 걸까. 대기업에 다니던 사람들에게 그 사실 자체는 자존감 향상에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 그래서 퇴직 이후가 몹시 힘들 수도. 그러나 내가 교사라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쉽게 말하지 못했다. 직업이 뭐예요,라는 질문에 ‘저 초등학교 교사예요’라고 답해 본 적이 거의 없다. 교사에 대한 넓고도 깊은 부정적인 편견. 이건 대부분의 교사들이 마찬가지일 것이다. 과연 교사라는 걸 밝혀서 좋았던 적이 있었는지. 전직 교사는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현직 교사도 내겐 별 의미가 없다. 의미? 16년 동안 내 직업에서 미친 듯이 의미를 찾았지만 이곳저곳에서 들려온 대답은 한결같았다.
“그냥 해~”
사실 이 직업은 의미를 찾지 않아도 그냥저냥 할 수 있었던 것 아닐까. 내가 그동안 삽질한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