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증과 휴식
헬스장에 매일 같이 출근한 지 일주일, 폭식과 구토를 멈춘 것도 일주일 째 되던 날이었다. 그동안 폭토를 하지 않은 것은 대단한 일이지만 무엇보다 과식에 대한 욕구 자체가 사라져서 신기했다. 헬스장 문 닫는 날이 아니라면 매일 같이 출근 도장을 찍으리라 마음먹었다. 나는 이제부터 헬스장의 여신, 아니 화신이 되겠어!
그러나 딱 일주일이 되자 몸에서 통증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물론 PT 첫날부터 당연히 근육통은 있었다. (화장실 변기에도 울면서 앉았다) 지금의 통증은 그런 건강한 부류의 것이 아니었다. 몸이 힘들면 끙끙 앓던 때와 비슷했다. 오른쪽 발바닥과 오른쪽 무릎이 신경 쓰이게 아프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4일째부터 조금 거슬렸는데 설마, 하며 무시해 왔다. 그러나 통증은 서서히 존재감을 드러냈다. 유튜브의 여러 운동 채널에서는 오랫동안 운동하려면 몸에서 일어나는 통증을 돌보아야 한다고 했었다.
러닝 머신을 탈 때만 조금 욱신거리던 발바닥은 이제 타지 않을 때에도 조금 부은 듯한 느낌이 들었고 ‘어쩐지’ 많이 걸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무릎 역시 스쿼트를 할 때엔 괜찮았지만 유산소가 문제였다. 30분을 넘게 걷기 시작하니 삐그덕거리기 시작했다. 내일도 헬스장에 가겠다며 은근히 부푼 마음을 안고 있었는데 이 몸으론 안 되겠다.
결국 하루 쉬어가기로 결정했다. 마침 오늘은 PT 수업도 없는 날이다. 어제의 일정이 피곤하기도 했으니 좀 여유롭게 쉬어야겠다. 나도 쉬고, 운동 가방도 쉬자.
그러나 오전이 채 지나가기도 전에 불안감이 마음속에서 싹트기 시작했다. 고작 하루 빠지는 것뿐인데도 갑자기 살이 불어날 것만 같았다. 내일 일어났더니 온몸에 살이 도도독 붙어있으면 어쩌지? 고작 하루 안 갔다고? 이따 저녁에라도 가야 하는 것 아닐까? 발바닥이 좀 괜찮아진 것 같은데 가서 천천히라도 걸으면 살이 빠지지 않을까? 통증이 있다는 건 무리하고 있다는 뜻이지만 멈추면 안 된다는 강박적인 마음이 안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한 번 가기로 했으면 매일 같이 가야 직성이 풀리는 성정. 컨디션까지 무시하며 진행했다가 결국 커다란 역풍을 맞고 전부 다 그만둬버리는 무식한 행보. 비단 운동에서만 그런 모습을 보인 건 아니었다. 애초에 내가 헬스장에 등록한 이유 중 하나는 ‘식이장애 회복’을 위해서였다. 여기에 자꾸 ‘다이어트’가 끼어들면 필시 망한다. 숱한 시도로 알고 있다. 식이장애 회복과 다이어트는 양립할 수 없다. 둘 다 잡겠다는 신기루, 그 마음을 어서 빼내야 한다.
게다가 마음 한편에선 ‘먹고 싶다’는 악마의 소리가 뜬금없이 솟아나고 있었다.
-운동 쉰 김에 먹어버려.
-이 틈에 아이스크림을 먹어!
-뒹굴 거리며 과자를 먹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휴식 아닐까?
딱히 지금 뭘 먹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아침 식사는 고기 양배추 볶음으로 든든히 먹었다. 덕분에 커피 생각이 안 날 정도로 포만감이 들었다. 그런데 여기서 갑자기 아이스크림? 과자? 몸의 항상성은 이런 쪽에서도 발휘되는 모양이다. 그동안 나에게 휴식은 주체할 수 없이 먹고 뒹구는 것이었다. 그러다 과하면 결국 토해내었다. 수년간 지속해 온 휴식의 모양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네가 건강한 휴식을 취하겠다고? 청소를 하며 음악을 듣고 책을 읽겠다고? 건강한 마음으로 운동을 하는 것도 마음에 안 들어 죽겠는데 휴식마저 올곧은 방법으로 하겠다니, 몸은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악을 썼다. 몸에게 이로운 것인데도 이러는 것을 보며 그동안 나는 내 몸을 어디까지 망가트린 것일까, 한탄했다.
예전 같으면 바로 편의점으로 달려가 억눌러 왔던 군것질거리에 더해 별로 먹고 싶지 않은 것들까지 몇만 원어치 구입해 와서 한꺼번에 벌려놓고 먹었을 것이다. 유튜브를 틀어놓고, 맛도 모르며 머릿속엔 그저 ‘먹어, 먹어, 씹어, 삼켜’만 외치면서. 지루함을 달래려, 수치심을 없애려, 한심함을 숨기려, 실망감을 포장하려 그렇게 먹었다. 다 먹고 나면 물을 잔뜩 마신 뒤 빈 껍질을 깨끗하게 정리해 쓰레기통에 버리고 설거지를 바로 마친다. 폭식 후 이렇게 부지런할 수 있는 이유는 뱃속에서 음식물이 충분히 불어날 시간을 주기 위함이다. 그래야 토해낼 때 편했다. 뒷정리를 모두 마치면 신성한 의식을 치르듯 화장실 변기 앞에서 깔끔하게 1~2분 만에 죄다 토한다. 이젠 어렵지도 않다. 목이 조금 따끔거리고 왼쪽 가슴이 찌릿하다. 위액으로 잔뜩 젖은 입과 손을 강한 향이 나는 비누로 씻어낸다. 잠시 후 양치를 하고 물을 마시면 이 엉망진창인 의식은 마무리된다.
그게 지난 나의 20년이었다. 지긋지긋했고, 안녕을 고하고 싶었다.
그때 식탁에 놓인 탄산수 한 병이 보였다. 몸은 때론 갈증을 허기로 착각한다는 말을 들었다. 단숨에 탄산수 한 병을 왈칵 마셨다. 조금은 촉촉해진 몸을 잠시 진정시키고 잠을 청하기로 했다. 어제의 일정이 무리였는지 꽤 피곤하다. 이것이 식욕을 불러일으키는 느낌이다. 오늘은 잠을 조금 늘려 쉬자. 발바닥과 무릎도 중력의 힘에서 잠시 벗어나 같이 늘어진다. 먹어서 느끼는 원초적인 쾌락도 있지만 이렇게 눈을 감고 쪽잠을 취하는 휴식이 있다는 것을 마흔이 넘어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