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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만찬

소화시킬 만큼만

by 김지현

누구나 모임 한두 개쯤은 가지고 있을 테다. 식이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대부분은 모임이 있으면 전날부터 급격히 긴장감이 높아진다. 사람들을 만나는 동안은 주로 바깥 음식을 먹게 된다. 식당과 메뉴가 정해진 모임이라면 그나마 다행이다. 만나서 정해야 한다면 머리가 복잡해진다. 식이장애가 있는 나에게 모임은 ‘음식과의 전쟁터’ 일뿐이었다.


하지만 그중 가장 곤란한 모임은 ‘친정 가족 모임’이다. 우리 가족들은 평소에 과식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이런 특별한 날이 있으면 맛있고 비싼 메뉴들을 한데 모아 과식을 거쳐 폭식까지 가곤 했다. 천천히, 그리고 대단한 양을 먹는 모임이었다. 음식을 만듦과 동시에 먹으면서 무수한 이야기를 나눈다. 아주 건전하고 화목한 그림이다. 그러나 나에겐 환장할 만큼 폭식 트리거의 연속인 것이다.

이틀 전, 오랜만의 가족 모임이 있었다. 역시나 전날부터 서로 전화를 걸어 무얼 먹고 싶은지 메뉴를 정하기 바빴다. 그때마다 나는 한결같이 대답했다.


“그냥 뭐. 먹던 것 먹지.”


이번만은 반드시 폭식하지 않겠다는 일종의 결심이 섰다. 먹고 싶은 것이야 많지만 내 입으로 말할 수는 없다. 그랬다간 봉인된 것들이 모조리 풀릴까 봐 두려웠다. 알고 있다. 말은 저렇게 했지만 이번에도 위험한 상황이 펼쳐진다는 걸.


메뉴는 화려했다. 장작 삼겹살 구이에 전복 버터구이, 주꾸미 삼겹살 볶음에 디저트로 숯에 구운 군고구마까지. 오후엔 미리 준비해 둔 케이크와 수박을 먹기로 했다. 혹시 몰라 라면에 비빔면까지 예비 식량으로 준비되어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사실상 한 끼니였다. 입 짧은 사람들 저마다의 요구가 합쳐지면 늘 이런 일이 벌어지고 만다. 각자가 먹고 싶은 걸 모두 준비해 버리는 스케일. 여기서 제일 곤혹스러운 건 나. 맛있는 음식 앞에서 이성을 잃을 것 같아 정신 줄을 꽉 잡고 있었다.


갓 구운 삼겹살부터 시작된 점심 식사. 처음엔 늘 조심한다. 딱 서너 점만 먹어야지. 맛만 보는 거야. 보통 그렇게 시작된 간소한 점심은 시간이 지날수록 ‘에라 모르겠다’ 정신을 장착하곤 눈이 뒤집혀 푸짐해진다. 더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위장을 꼭꼭 채운다. 평소 식사를 제한했던 만큼 이런 특별한 날엔 마음이 더 풀어진다. 그리고 한 끝엔 늘 비빌 언덕이 있었다.

‘어차피 이따가 토해버리면 되는걸’

가끔은 토한 뒤 다시 먹기도 했다. 옛날 유럽 귀족들의 모습이다. 잔뜩 먹은 것을 양동이에 토해내고 다시 식사를 이어가는 것. 나는 귀족도 아닌 평민 나부랭이면서 무얼 믿고 무턱대고 토하는가. 맛도 모른 채, 먹는다는 행위에 심취해 입에 집어넣어 씹고 삼킨다. 이윽고 버티지 못해 성대한 구토를 마친 뒤, 아무 일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래.... 즐거운 하루였어. 적어도 가족들에겐.


하지만 오늘만큼은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즐거운 날, 언제 토할지 타이밍을 재며 전전긍긍 눈치를 보고 싶지 않았다. 맛있게 음식을 누리는 ‘나’로 존재하고 싶었다. 그래서 혼잣말로 여러 번 되뇌었다.

-즐겁게, 맛있게, 소화시킬 만큼만!


삼겹살을 한입에 넣고 꼭꼭 딱 30번 씹어 삼켰다. 눈앞의 접시를 몽땅 비워버리고 싶은 탐욕이 들끓었다. 오늘은 소화시킬 만큼만 먹자. 부지런히 움직이며 심부름을 도맡았다. 어미 새처럼 아이들에게 부지런히 음식을 날라 먹였으며 음식이 아닌 가족들의 이야기에 집중했고 틈틈이 탄산수를 마셔가며 입안을 정리했다. 이어 등장하는 메뉴를 나는 살갑게 웃으며 반겼다. 그리고 맛있게 먹으며 맛 표현을 신나게 했다. 나의 창의적인 리액션에 다들 더욱 흥겨워하는 것 같았다. 물론 중간중간 정신을 잃고 폭식해 버릴까 생각도 했지만 지금 상태로도 충분히 즐거웠다. 먹는 한 입 한 입, 충분히 맛있어하는 내 모습. 생각해 보니 나는 여태 폭식하면서 열 번 넘게 씹어 삼킨 적도, 씹고 있는 음식물의 맛을 느껴본 적도 없었구나!


즐거운 가족 모임이 기분 좋게 마무리되었다. 아, 아까 그거 더 먹을걸, 하는 아쉬움은 들지 않았다. 다음번 가족 모임은 물론, 다른 외부 모임에 나가서도 음식을 조금은 조절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메뉴가 나올 때마다 신경을 곤두세워 너무나 피곤하다. 정신 줄을 붙잡는 데 모든 에너지를 써버린 모양이다. 집에 가서 편안한 휴식을 취해야겠다.


토하지 않고 사는 삶, 소화제가 필요 없는 삶은 어떤 모습일까. 마음이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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