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앞에 큰 산이 하나 있다. 그리고 그 앞에는 공원이 있는데, 이미 공원에서부터 꽤 높은 위치인 탓에 내가 사는 도시를 내려다볼 수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다. 특히 자정이 지난, 늦은 시간을 가장 좋아한다.
늦은 시간 공원에 올라가면 내가 사는 도시의 야경이 눈에 들어온다. 낮에 일을 다녀온 곳은 저기쯤이겠구나, 저긴 옛날에 운동할 때 정말 자주 갔던 공원이지 생각하며 조금씩 나의 내면으로 들어간다.
보통 늦은 시간 공원에 올라가서 내가 하는 일은 사색이라고 하면 좋을 것 같다. 꽤 많은 사람들이 사색하는 법을 모른다. 누군가가 내게 물었다.
"가만히 있으면 안 심심해?"
일을 하거나 운동, 독서를 하는 게 아니라면 나는 대부분 가만히 있는다. 휴대폰을 하기도 하지만 가만히 있는 시간이 제일 좋다. 그저 눈을 감고 생각하는 것이다. 과거에 있었던 일이나 오늘 있었던 일, 또는 후회되는 일들을 말이다. 많은 이들이 이 말을 듣고는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나는 생각이 잘 안 나. 대체 그렇게 많은 생각들이 어디서 나오는 거야?"
알다시피 나는 작은 사건 속에서도 의미를 찾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이들보다 생각할 거리가 많은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일까. 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할 수 있다. 지금부터 깊은 생각에 잠기는 방법을 알려주겠다.
먼저 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생각하는 법을 알려준다더니 아무것도 하지 말라니 이게 무슨 말인가 싶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이것이 가장 기초라고 생각한다.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려면 그 도화지가 새것이어야 한다. 일상에 치여 살던 우리의 머리를 비우고 나면 그때부터 잊고 있던 기억들이 하나 둘 그려질 것이다.
마치 휴대폰 용량을 확보하기 위해 사진첩을 정리할 때처럼, 잊고 있던 기억들이 하나둘씩 그려진다. 흑역사라고 부를만한 일들, 작은 것에 칭찬받았던 일들, 괴로웠던 일들. 이렇게나 많은 일이 있었는데 왜 잊고 있었을까. 내가 너무 여유 없이 살았구나 생각하게 된다. 그렇다. 어쩌면 사색은 우리의 뇌 용량을 확보하는 시간이다.
사색을 통해 대체 뭘 얻을 수 있을까? 내 경험에 따르면, 내가 작은 사건들 속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건 모두 사색 덕분이다. 사색을 통해 잊고 있던 기억들을 모두 꺼낸다. 그 기억들을 되새기며 생각한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그로 인해 어떤 결과를 맞이했지? 더 잘할 수 있었을까? 다음에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움직이면 좋을까? 등등. 하나의 사건에 수많은 물음을 던진다. 그 물음에 답할 수 있는 건 오직 나 자신뿐이다. 공부를 할 때 예습과 복습을 하듯, 나의 삶을 복습하는 것이다. 내 삶을 복습해서 의미를 많이 찾을수록 실수할 일이 적어지고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여러 관점으로 사건을 바라볼 수 있다.
사람은 어떤 일이 일어날 때마다 보통 무의식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그래서 후회하는 일이 많다. 그때 내가 왜 그렇게 말했을까,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 하는 후회는 누구나 다 해봤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사색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사색을 하며 그때의 기억을 복습하고 어떻게 했으면 좋았을지 생각해 본다. 분명 최적의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그걸 찾아내고 나면 다음에 비슷한 일이 생겼을 때는 무의식적으로 반응하기 전에 복습했던 이미지가 떠오를 것이고, 그걸 행동으로 옮기는 것에 성공한다면 우리는 실수하는 일이 하나 줄어드는 것이다. 사색을 하면 할수록 그만큼 실수하는 일이 줄어든다.
우리는 때로 관점이 맞지 않아서 싸우는 경우가 많다. 살아온 배경이 다르고 방법이 다르며 그로 인해 모두의 가치관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나 또한 과거에는 가치관이 다른 이들과 싸운 적이 많다. 하지만 싸움으로 인해 얻는 것은 상대가 내 가치관을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고 내가 상대의 가치관을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다. 그저 감정의 골만 깊어질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싸울 필요가 있을까? 이에 대해 사색하는 시간을 가져보자.
나의 내면 속
"그런 식으로 살면 답답하지 않나?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지?"
'그야 넌 A를 위해 살지만 그 사람은 B를 위해 사니까 그렇지.'
"넌 누구야?"
'나도 너야. 감정이 가라앉았을 뿐이지.'
사색을 할 때쯤이면 감정은 이미 가라앉아 있기에 쉽게 흥분하지 않고 침착한 생각을 할 수 있다. 그제야 상대가 그런 가치관을 가진 이유들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 나는 A를 위해 살고 그 사람은 B를 위해 살고 있어. 살아온 배경에 따라 삶의 목표와 인격은 모두 달라지기에 모두가 같은 가치관을 가질 수는 없는 거지. 우리의 가치관은 서로 다른 쪽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거야. 아까는 왜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하고 나의 가치관을 그 사람에게 집어넣으려고 했던 걸까?'
사색이 계속될수록 깨달음도 깊어진다.
'내가 한 번도 이것에 대한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서 그렇구나. 다음에 또 나와 가치관이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하게 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그래, 내 가치관을 강요하는 게 아니라 상대의 의견을 반박하지 않고 나는 이렇게 살아왔다고, 그래서 이렇게 생각한다고 이야기만 해주면 되겠지. 상대의 이야기를 듣고 '그럴 수도 있겠구나'라는 말을 내뱉는 용기도 필요한 것 같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라는 말을 내뱉는 것은 어째서인지 큰 용기가 필요하다. 내가 살아온 인생을 부정하는 기분도 들고 내가 틀렸다는 느낌도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번 상대를 이해하는 것에 성공한다면 분명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게 될 것이다. 채사장 작가의 '열한 계단'이라는 책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당신이 불편한 세계를 선택하고, 그 불편함을 극복해 가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세계는 아주 넓고 오래되었으며, 그래서 신비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가치관만이 맞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넓은 세계와 신비함을 알지 못한다. 방금 말했듯 상대의 가치관이 불편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 불편함을 극복하고 그럴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더 나아가서 그 불편한 세계를 알아가려 든다면 우리의 세계는 더 넓어지는 것이다. 불편함을 많이 극복할수록 우리의 세계는 더 넓어질 것이다.
내가 사색하는 이유는 이렇다. 의미를 찾고 앞으로의 삶에 적용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내 세계를 더 넓히기 위해서.
주위에서 내게 침착하다는 소리를 많이 한다. 사색을 통해 과거의 일을 복습하여 앞으로의 일에 대한 예습을 했기 때문이다. 예습했던 대로 행동하면 되니 허둥지둥할 이유가 없다. 설령 예습했던 일이 아닌 새로운 일이 벌어져도 괜찮다. 세상사는 모두 비슷하기 때문에 내가 사색했던 것들이 서로 시너지를 이루며 지금 이 상황에서 최적의 행동을 금방 생각해 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지금도 계속해서 다른 가치관을 받아들이는 용기를 내며 나아가고 있다. 그러기 위해 하루의 많은 시간을 독서와 사색에 쓴다. 불편함을 이겨내고 내 세계가 확장될 때마다 확장되기 이전의 내가 부끄럽다. 언제쯤이면 내 세상이 우주만큼 넓어질까?
많은 사람들이 사색을 즐겼으면 좋겠다. 혼자서 힘들다면 내가 도와줘서라도 사색을 하도록 만들고 싶다. 개개인의 세상이 넓어지면 결국 이 세상은 하나가 되지 않을까? 오늘도 이런 생각을 안고 공원에 올라가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