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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선호 Oct 28. 2024

소주 한 병

2부_비로소 방황을 알았다

청양 어귀 가난한 시골집마다

배고픈 개구쟁이가 늘 그러하듯

할아버지 몰래 기울였던

아빠 잔은 한 잔, 내 잔은 빈 잔.


사랑한다고, 장대비 속

조신하게 걸어온 앳된 엄마의 삶에

가난한 반지 하나 해주며 기울였던

아빠 잔은 한 잔, 내 잔은 빈 잔.


텅 빈 살구맛 피크닉과

단칸방 곰팡내로 배부른

아내의 만삭 된 배 어루만지며

꼴딱꼴딱 애잔히 기울였던

아빠 잔은 한 잔, 내 잔은 빈 잔.


구내식당 점심값 이천오백 원

슈퍼마켓 과자상자도 이천오백 원

결국 아들 한 입 와삭와삭 소리에

종일 곯고 곯은 배에 기울였던

아빠 잔은 한 잔, 내 잔은 빈 잔.


아내 영정사진의 한 맺힌 눈초리에

어린 자식들의 원망 어린 눈초리에

괴롭도록 서글프게 기울였던

아빠 잔은 한 잔, 내 잔은 빈 잔.


구멍 난 양말과 주부 습진,

작은 방 닫힌 문과 잠긴 마음도

모두 못난 아비의 억울한 죗값이듯

베란다 창살 아래 기울였던

아빠 잔은 한 잔, 내 잔은 빈 잔.


그렇게 의사아들, 목사아들

보란 듯이 잘 키워 놓고는

닳고 닳아 운명한 아비노릇을

말없이 슬퍼하며 기울였던

아빠 잔은 한 잔, 내 잔은 빈 잔.


아내의 빈자리 여전한 밤

이젠 자식들도 먼 길 떠나보내고

익숙하게 적적한 외로운 밤에

아무리 기울여도 차지 않는


아빠 잔은 반 잔,

내 잔은 여전히 빈 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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