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미숙 Nov 14. 2024

홀로 아리랑

사랑과 상처 속 어르신의 삶

꽃이 말해주는 이야기: 붉은 카네이션은 사랑과 존경을 상징하지만, 동시에 내면에 깃든 상처와 그리움을 품은 느낌을 줍니다. 낮과 밤이 바뀔 때마다 감정의 물결에 휩싸이는 어르신의 모습은 카네이션이 주는 애틋함과 슬픔을 떠오르게 합니다. 한평생 꾹꾹 누르고 억누르며 살아온 깊은 마음이 그 밤마다 피어나는 붉은 꽃처럼 드러나는 듯해요.



3.


어스름 노을만 지면 섬망 증상이 심화하면서 낮과 밤 다른 모습으로 바뀌는 어르신이 계셨다. 낮에 뵈면 달달하시고 정 많고, 똑 부러진 성품을 가지신 여장부 같은 참 좋은 분인데, 밤에는 폭군으로 변하여 무언가 한이 맺힌 것을 쏟아내신다. 


가만히 알 수 없는 혼자만의 중얼거림을 듣고 있으면, 젊은 시절 남편의 바람으로 많은 상처를 받으신 것 같다. 


정신이 맑을 때 여쭈니 오랫동안 집에 안 들어오는 남편을 작은 각시와 함께 당신 집에 데려와 두 집 살이를 했다고 하시고, 늘 옆방에서 작은 각시와 보내는 남편을 향하여 속을 끓고 사셨던 모양이다. 


여기서도 순간순간 과거로 돌아가 화병처럼 방 밖을 향한 눈은 분노로 가득 차 있고, 갖은 욕과 함께 소리소리 지르시다 매일 똑같은 새벽을 맞이하신다.


잠을 잊어버리고 오직 남편을 향한 삶이 거기서 멈춰 있는 것 같았고, 그렇게 매일 밤을 지칠 줄 모르고 침상 난간을 흔드시며 소리 내어 가족들 이름도 부르시면서 매일 우짖다 지새신다. 


얼마나 수많은 세월과 시간 속에서 힘드셨기에 이렇듯 온몸으로 발산하시는 것인지 안타까웠다. 그렇게 다시 평온한 아침이 찾아오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깊은 잠에 빠지신다. 지난밤 일을 여쭈면 아무 기억 못 하시고 "내가 그랬냐?"며 미안해하신다.


당신은 부잣집 막내딸로 태어나 아버지 사랑만 너무 듬뿍 받고 고생 없이 생각시로 살다 중매로 부잣집 큰아들 집이라고 시집을 와보니,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가난한 시집살이로 전향. 


친정아버님의 큰 도움 받으며 집안을 일궈나가 자식 낳아 살았다면서 그저 평범하게 살 줄 알았는데, 남편의 심한 바람으로 그 시절 꾹꾹 참고 인내하며 내색 못 했던 애정의 상처들이 하나둘씩 표출되고 있었다. 


평생 그렇게 고통스러운 날을 왜 참고만 사셨냐고 여쭈니, 4남매 자식 때문이라지만, 핑계 아닌 핑계, 남편을 너무 사랑하셨던 것 같았다. 띄엄띄엄 잘생긴 남편의 자랑도 빼놓지 않으며 미소 머금은 얼굴엔 그리움이 뚝뚝 묻어났다. 


그 시절의 남자들 바람은 당연히 애들과 살려면 받아들여야 하던 시절이었다고 말씀하시면서 원망의 볼멘소리를 높이셨다.


어린 시절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어르신께서는 친정아버님이 마을 곳곳에 어려운 사람들에게 도움 주시며 베푸는 것 많이 보고 살아서 차마 가족한테 모질게 못 하고 사셨다 하신다. 


낮에는 평온하게 대부분 방에서 TV만 보려 하고 단체 활동도 싫어하시며 의미를 두지 않으려 하셨다. 유난히 남자 어르신만 보면 싫은 내색을 하시고 왠지 모를 거리를 두시며, 말을 건네면 버럭부터 하셨다.


인생에 굴곡 없는 사람 있겠소 만은, 받아들이기 힘든 당신의 인생살이 무게가 어찌 이렇듯 힘겨워 보이시는지… 밤마다 한이 맺힌 그림자가 언제쯤이면 사그라들까…

매거진의 이전글 복사꽃 청춘어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