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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털목욕탕

냉탕과 온탕

by 북숄더

목욕탕에 가 샤워를 하고 온탕에 들어가 때를 불린다. 엄마가 부르기 전에 온탕 밖으로 나와선 안 된다. 나는 마음이 급하다. 얼른 때를 밀고 찬물에 들어가 철퍽철퍽 수영을 해야 하는데 엄마는 왜 나를 부르지 않을까.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해 나는 늘 미미를 데려갔다. 뜨거운 물속에 미미와 함께 있으면 괜찮았기 때문이다.


어른이 되고 혼자 목욕탕에 간다. 어릴 때처럼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때를 밀고 찬물에서 한참 놀다 온다. 지금도 찬물에서 노는 게 좋다. 어른이 된 후부터는 세신을 받는다. 뜨거운 물에 10분만 있으면 내 락커 번호가 불린다. 급히 일어나다가 현기증이 오고 눈앞이 하얘질 때도 있다.


세신사의 구호에 맞춰 몸을 뒤집고 또 뒤집다 보면 간단한 마사지와 함께 때밀기가 끝난다. 그때부터는 내 세상이다. 처음 몇 분만 참으면 찬물이 미지근하게 느껴진다. 그때부터 열심히 헤엄치고 논다.




어느 날,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가 탕에 들어와 내 옆으로 다가왔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아이가 나를 보며 싱긋 웃는다. 순수한 얼굴에 나도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조금 떨어져 놀다가도 다시 내 옆으로 다가온다. 몇 번을 반복하니 불편해져 탕 밖으로 나왔다. 그 아이도 따라 나와 엄마에게 간다.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어릴 적 내가 미미와 함께했던 것처럼, 저 아이는 나와 놀고 싶었던 걸까. 하지만 나는 어른의 눈으로 선을 그어버렸다. 같이 놀 수도 없는 일이다. 그 생각에 미안함이 스쳤다.




슬슬 다시 일을 시작하려고 몇 군데 지원했으나 연락이 없었다. 마흔이 되면 이력서를 넣어도 연락이 안 온다던데, 정말 그런가 싶어 정신이 번쩍 들었다. 1~2년 정도 회사에서 경력을 쌓고 싶은 일이 있다. 하지만 경험도 경력도 없는 나이 많은 신입을 받아줄 곳이 있을까. 더군다나 젊은 인재들도 취업이 어려운 시대 아닌가. 그 뒤로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창업 교육을 받으러 다녔다.


강의 내용은 예비 창업자들에게 안성맞춤이었다. 교육을 받으며 혼자 사업계획서도 써보고 이런저런 구상도 해보았다. 하지만 현실은 내 상상과 달랐다. 오프라인 강의와 온라인 강의를 들으며 배운 것들은 한계가 있었다. 결국 필터 낀 유리벽이 박살 났다.


교육 기간은 단 5일. 그 짧은 시간 동안 내 감정은 냉탕과 온탕을 오갔다. 도전 의욕으로 심장이 뜨겁게 달아올랐다가, 금세 차갑게 식어버리기를 반복했다. 교육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머리가 복잡했다. 무거운 마음을 안고 버스를 타는 게 힘들어 그냥 걸었다. 생각이 많을 땐 걷는 게 가장 좋으니까.




생각 공장 컨베이어 벨트에 ‘냉탕’과 ‘온탕’이라는 단어가 걸렸다.

새로운 생각이 밀려들지 못해 집에 오는 내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냉탕과 온탕… 냉탕 하고 온탕…

뜨거운 물에 들어가면 혈관이 확장되고, 찬물에 들어가면 혈관이 수축하고, 어쩌고저쩌고 해서 몸에 좋단다.

냉탕은 염증 반응을 줄이고, 온탕은 근육을 이완시킨다고 한다.

급격한 온도 변화는 면역체계를 강화하고, 피부 탄력에도 도움이 된단다.




나는 그동안 멘털 목욕탕에 다녔다.

말랑해진 정신력이 "현실"이란 냉탕에서 얼었다가 "길은 얼마든지 있다"는 온탕에서 희망회로 돌리고

"불안과 조바심"이라는 냉탕에서 헤엄치다가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는 온탕에서 간절함을 장착했다.

단기간에 여러 번 급격한 온도 변화를 겪으며, 내 뇌는 회복탄력성 +1 성장했다.

게임 속 캐릭터가 레벨 업하면 같은 공격에도 대미지가 줄어들듯, 이제 나는 예전보다 더 단단해졌다.

상처를 받아도 깊게 페이지 않는다.





고통은 인간을 성장하게 한다.

신은 인간이 감당할 만큼의 고통만 준다고 한다.


오늘의 고통은 과거 내 선택의 결과다.

내게 남은 건 선택을 책임지는 것뿐이다.


남들보다 늦게 시작했다고 포기할 필요 없다.

단지 "빨리, 많이" 하면 된다.


불교에서 인간은 8번의 생을 산단다.

그중 마지막 생이 가장 힘들다고 한다.

나는 이번생이 마지막이길 빌면서

내 죄를 다 털어버리겠다는 일념으로 산다.

그러니 못 할 것도 안 할 것도 없다.




혹시 나처럼 뇌나 심장의 온도 변화를 겪고 있다면,

이건 회복탄력성 테스트 중이라고 생각하자.

당신은 지금 성장하는 중이다.








사진: https://www.pexels.com/ko-kr/photo/15883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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