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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ie Gardner Aug 21. 2024

차는 굴러가기만 하면 되지

결혼한 지 1년 즈음되었던 시기, 친했던 고등학교 동창이 속초에서 결혼을 해 남편과 함께 가기로 했다.


기차를 타고 가려했는데 남편이 굳이 운전을 해 가자고 한다.

우린 동두천 미군 부대 근처 아파트에 살았었고, 미군들은 대부분 본토에 차량을 가지고 있기에 길어봐야 2년인 한국 주둔기간 내엔 새 차량을 사진 않는다.


폐차 직전의 차들, 말 그대로 굴러가기만 하면 되는 차량을 구입해 통근용으로 타고 다니곤 했고, 우리 남편도 예외가 아니었다.


여기저기 녹이 난 곳이 보이는 쑥색 1세대 구형 아반떼... 남편이 주둔을 마친 다른 미군에게 20만 원에 구입했던 차량이다.


내 나이 당시 스물다섯. 스물다섯이면 한창 보이는 것에 목숨을 걸 때잖아.

동창 결혼식에 가는데, 거기 동창들이 다 올 테고, 졸업 후 못 봤다가 만나는 얼굴들도 많을 텐데, 이걸 타고 가자고...?



그럼 렌트를 하자고 했지만 굴러가는 차가 있는데 왜 렌트를 해 돈을 쓰냐며 이해하지 못하겠단 반응. 속초까지 130km인데 그 장거리를 과연 이 차가 왔다 갔다 할 수나 있겠나, 이런저런 핑계를 대 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같았다.


결국 우리는 저녁에 아반떼와 함께 출발했다. 중간 꾸벅꾸벅 조는 남편 때문에 기겁을 하고 휴게소에 차를 세우고 차에서 두어 시간, 내 생애 처음 차박도 했다. 요즘 많이들 하는 폼나는 SUV 캠핑 아니고, 그냥 운전석 조수석에 누워서 코트 덮고 자는 거.


식을 마친 후, 다른 친구들은 자기들끼리 버스를 대절했거나, 기차를 타고 갔지만 우리는 운전을 해 다시 가야 하기 때문에 식장에서 남들보다 조금 일찍 출발했다. 친구들이 앞에 우르르 몰려있었다.


안녕 하고 돌아서서 아반떼에 올라탄 후 차창 너머로 보이던 몇몇 친구들 표정이 아직도 기억난다.

다는 아니었지만, 몇 명은 헐 뭐야? 하는 눈빛으로 봤다. 그 순간은 좀 모양 떨어지고, 창피하기도 했던 것 같다.



미국 입국하고 보니 새것 같은 폰티악이 있다. 한국 파병 직전 사서 시엄빠네 집에 맡겨놨으니 새 차가 맞단다.


차에 관련된 에피소드들로 시작해 나도 소비관념이 바뀌기 시작했던 것 같다. 보이는 것에 가치를 많이 두는 사회에서 자랐던 나라면 새 차를 이역만리 떨어진 곳에 사놓았든 말든 당장 모양 빠지긴 싫으니 당연히 렌트를 했겠지. 할 수 있는 것 중에 젤 좋은 걸 했겠지.


차는 굴러가면 되고, 안전하면 된다는 철학은 확실하게 각인되어 내 소비 전반에 걸쳐 영향을 준다. 더해서 아무도 누가 뭘 타고 뭘 입는지 신경 쓰지 않는 곳으로 이사를 왔으니. 보이는 것의 가치는 우리 부부에게 있어 '여건이 되면 하고, 안 되면 굳이 필요 없고' 정도.


그런 태도를 가지게 되니 분명히 '있어 보이기 위해' 뭔가 더 필요해지는 경우도, 전전긍긍하는 마인드도 없어졌고, 눈치를 보지 않게 됐고, 누가 나를 평가질해도 별 타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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