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모될 뿐이라면 승진이 능사는 아니다
교육 중심 대학에서 분에 넘치게 연구 지원을 꽤나 많이 받고 있어서 참 감사한 와중에 올해 9월 1일 자로 승진을 하면서 뭔가 내가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 하는 일들을 훨씬 더 많이 하고 있는 느낌을 받는다. 돈을 더 많이 받는 만큼 일을 더 많이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한 대학 측의 입장이 느껴진다. 시스템적으로 생각했을 때 돈을 더 많이 받는 사람이 일을 더 많이 하는 것이 모두에게 공평하고 옳은 것이 맞다.
또한 누가 승진을 나한테 억지로 하라고 시킨 것도 아니고 내가 하고 싶어서 신청해서 되었으며, 누군가들은 승진을 하고 싶지만 되지 않아서 속상하기도 할 테니까 어디 가서 불평불만을 하면 안 되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승진을 하면서 더 많은 일들을, 그것도 내가 딱히 원하지 않았던 일들을 훨씬 더 많이 하고 있는 상황이 되니까 그리 즐거운 것 같지는 않다.
아, 이래서 영국의 꽤나 많은 교수들이 굳이 승진을 하려고 하지 않거나 승진을 하고서 파트타임 전환을 하는 것이구나, 하고 이해가 되었다. 승진하기 전에는 아니, 왜, 굳이? 하고 이런 사람들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지금은 왜인지 잘 알 것 같다.
승진 이후 나의 상황은 다음과 같다. 승진을 하면서 동시에 2025년 9월 1일 자로 단과대 두 개가 통합되었다. 200명이 넘는 우리 인문예술 단과대 Faculty of Arts, Design and Humanities와 400명이 넘는 공대 Faculty of Computing, Engineering and Media가 합쳐져서 직원이 600명 이상인 우리 대학 최대 규모 단과대 기술예술문화대 Faculty of Technology, Arts and Culture가 되었다. 이전 단과대에서 연구윤리장 Faculty Head of Research Ethics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0.2 FTE (20퍼센트 full time equivalent = 일주일에 하루만큼의 업무량)이었다. 지금 3배 규모의 단과대에서 3배만큼은 아니어도 2배 정도의 일을 하고 있지만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같은 0.2 FTE이다. 이 또한 누가 나한테 억지로 시킨 것이 아니라 내가 하겠다고 지원해서 인터뷰하고 뽑힌 것이므로 과거의 나 자신 이외에 아무도 탓할 사람이 없다.
전반적으로 요새 주 5일 근무 중 4일 정도는 팀미팅, 다양한 보직 커미티 미팅들, 박사생 지도 미팅 등등 이런저런 미팅들에 자주 들어가고 있다. 하루 평균 미팅 수는 적으면 2개, 많으면 8개 이상이 되기도 한다. 매일 적으면 10개, 많으면 50개 정도의 이메일들을 읽고 답장을 보내고 있다.
올해 10월, 11월 두 달간 수업 시수가 감면되는 teaching relief 연구년 비슷한 연구달 research leave을 받았으나 전체 수업 감면도 아니어서 여전히 학부생 수업을 나가고 있다. 11월 말부터는 수목금 수업에 들어가며, 박사생 수도 늘고 보직도 들고 다른 일들이 더 늘어난 와중에 작년 대비 수업 시수도 더 늘었다. 수업 시수까지 늘어나다니 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역시나 승진을 막 해버린 터라, 그리고 내가 승진하는 새에 100명 이상의 다른 교수님들이 명퇴를 하거나 해고되었기 때문에 어디에도 불평불만을 할 수가 없다 (작년 말부터 영국 대학들 대부분이 재정난을 겪고 있어서 다들 구조조정하고 난리다).
학부생들 수업에 들어가면 우리 학부생님들이 학교 최고의 고객님들이기 때문에 항상 최선을 다해서, 나의 최고의 인내심을 발휘하며, 영업용 미소를 방끗 날리면서 한분 한분 정성껏 가르쳐 드리고 있다. MBTI 대문자 I인 나로서는 이렇게 학생들과 2-3시간만 보내도 그날의 모든 소셜 에너지를 다 끌어다 쓴 것 같이 피곤하다. 매일같이 거의 하루 종일 학생들과 함께 하는 세상의 모든 초중고 선생님들은 진짜 대단한 것 같다.
모든 미팅이 끝나고, 모든 이메일에 답장을 다 해놓고, 수업이 다 끝나고, 모든 보직 관련 일들과 행정 잡무들을 다 처리해 놓고, 도움/피드백을 요청하는 석박사 학생들을 다 도와주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금방 다 지나간다. 평소 아침 8시 반 즈음에 일을 시작하는 편이지만 저녁 5시까지 해야 할 일들을 다 끝내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물론 매일 일이 끝나고 피곤하고 뿌듯하지만, 워낙 교육과 서포트, 서비스 업무 위주다 보니까 생산적인 느낌도 별로 없다. 매일 소모되고 있는 느낌이랄까. 이렇게 1년 즈음 지나고 나면 늘어난 업무량에 익숙해져서 더 효율적으로 일하면서 생산적으로 연구 활동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내년 가을에도 이렇게 소모적인 느낌만 받는다면 역시나 이직을 고려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