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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지전자에서 일하지 않았더라면

어느 다른 회사에 갔더라도 잘 적응했을 것 같진 않다.

by 성경은 Mar 08. 2025

나는 왜 엘지전자에서 일했는가

네덜 석사 유학 후에 한국에 돌아가서 어딘가 취업을 하고 내 밥벌이를 해야 했다. 그 당시는 요즘처럼 불경기라든가 엄청난 취업난 같은 것이 있었던 때는 아니었다. 그래도 그렇게 선택지가 많았던 느낌도 아니었다. 엘지전자(엘전)는 마침 시기적절하게 공채가 있었고, 지원하고 인터뷰하고 붙었다. 지원해서 뽑히기까지 뭐가 특별히 어렵다거나 힘들었던 기억은 없다. 그때만 해도 매년 대기업들은 공채로 사람들을 많이 뽑았고, 어디 더 좋은 곳으로 가느냐가 문제였지 어디를 가는 것 자체가 문제였던 때는 아니었다. 같은 시기에 삼전에서 일하던 친구 하나가 서류 한번 줘볼래 해서 전달을 했으나 그 이후 뭐 다른 진전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결론적으로는 한국에 들어간 시기에 맞춰 마침 공채가 열린 엘전에 지원해서 붙어서 갔다. 무슨 일에나 타이밍은 중요한 것이다.  


엘지전자에서 일해서 좋았던 점

엘전에서 일해서 좋았던 점들은 아래와 같다.

대기업에서 하는 디자인 리서치란 어떤 것인가 배웠다.

대기업에서 외주업체를 끼고 하는 리서치나 선행 디자인 프로젝트들은 어떻게 돌아가는가도 배웠다.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서 한국 안에만 해도 참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재미있는 프로젝트들을 단기간 안에 많이 했고, 해외 출장도 많이 다녔다.

짧고 굵게 다양한 경험들을 많이 했던 좋은 인생 경험이었다.

나는 한국에서의 사회생활이 잘 맞지 않는다는 확신을 얻었다.

시간이 지나고서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삼전을 다니고서 엘전까지 다녔기 때문에 한국에서의 회사 생활에 미련이 1도 없다. 삼전만 다녔다면 한국에서 삼전이 아닌 다른 회사를 가보는 것이 커리어 옵션 중의 하나로 항상 남아 있었을 것 같다. 삼전과 마찬가지로 엘전도 잘 나가는 세계적 대기업이라 다녔다는 이력이 살면서 도움이 안 된 적은 없었다. 엘전에서는 안타깝게도 소중한 새로운 인연들을 만들지는 못했지만, 엘전을 함께 다니다가 (각각 다양한 계기와 동기로) 그만둔 대학교 동기 여러 명은 지금까지도 연락하고 친하게 지내고 있다.


엘지전자에서 일해서 안 좋았던 점

엘지전자에서 일해서 안 좋았던 점들은 아래와 같다.

출퇴근 시간이 너무 힘들었다. 강북 집에서 양재에 있는 회사에 가기 위해서는 마을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한 번 갈아타고 양재역에 내려서 회사 셔틀버스를 타야 했는데 출근만 해도 내 체력의 절반 이상을 쓰는 느낌으로 힘들었다.

몇 달 대중교통으로 출퇴근을 하다가 너무 피곤해서 안될 것 같아서 언젠가부터는 계속 택시로 출근을 했더니 택시비만 한 달에 몇십만 원이 나왔다.

점심 같이 먹기, 회식, 워크숍, 회사 동료들과 잘 지내기 등등이 다 업무의 일환이라는 조직 문화는 나와 잘 맞지 않았다.

내가 살면서 만나보지 못했던 다양한 사람들과 같이 일을 하려니 쉽지 않았고 사람 스트레스가 컸다.

사람 스트레스를 비롯하여 전반적으로 몸도 마음도 너무 힘들었는지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황장애라는 것을 경험했다.

결론적으로는 엘전에서 정말 안 맞고 힘들었던 경험이 있었으니까 지금 영국에서 별 불만 없이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엘전은 나 같은 사람이 아닌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에게 잘 맞고 좋은 회사일 거라 믿는다. 내가 평균적인 한국인이 아니어서 나한테만 특별히 힘든 경험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엘지전자에서 일하지 않았더라면

엘전에서 일하지 않았더라면, 한국에 들어간 그 타이밍에 엘전 말고 다른 회사들에 공채가 있었다면, 충분히 다른 회사에 갔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그랬다면 그 어딘가 다른 회사가 아주 잘 맞아서 지금까지 계속 다니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혹은 거기도 잘 안 맞아서 결국엔 지금과 비슷한 상황에 왔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느낌으로는, 내 성격과 성향상, 어느 회사에 갔어도 썩 그렇게 잘 적응하고 아주 잘 맞고 즐겁고 행복하고 그러진 않았을 것 같다. 어딜 갔더라도 돌고 돌아 결국 영국에 와있었을 것만 같다. 영국은 나의 운명이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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