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etflix 지옥에 대한 단상 ③ ]
유치원 퇴근 후, 지원은 밀린 집안일을 한다.
옷가지를 개며 TV 뉴스를 보는데 속보가 뜬다.
도로 한복판에서 한 남자가 괴물체에 쫓겨 죽임을 당한다.
이게 진짜 뉴스 콘텐츠에서 나오는 실제 상황인가?
혹시 드라마 속 뉴스를 보여주는 한 대목인가 싶어
다른 채널을 계속 돌려보는데,
똑같은 뉴스가 모든 채널에 도배된다.
때마침 퇴근한 남편도 괴이한 뉴스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이날 이후, 지원의 일상이 달라진다.
아니, 온 대한민국의 일상이 달라진다.
불가사의한 현상에 내로라하는 박사들과 전문가들이 나와, 자기 전문 분야에 입각한 다양한 해석들을 내놓는다.
그중에서도 대중들로부터 가장 높은 설득력을 끌어낸 단체가 바로 새진리회.
지원은 매일 새진리회 정진수 의장의 설교를 필기까지 해가며 밤늦도록 시청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지옥 시연과 죄는 불가분의 관계.
지옥 고지를 받는 자들은 죄를 지은 자들인데,
신은 죄인들의 지옥 시연을 통해 인간이 더 정의로워져야 된다는 걸 알리는 중이란다.
몇 년 전, 아이를 유산하고 죄책감으로 살아온 지원은
새진리회 설교를 들으며, 자신이 죄인이란 걸 더욱 확신하게 된다.
언젠간 자신도 지옥 고지를 받게 될 거라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그녀에게 지옥 시연은 이제 남 일이 아니다.
지옥 시연이 생중계되는 현장을 찾은 지원.
그녀 뒤에선 남편이 불안한 눈빛으로 지키고 서 있다.
현장엔 얼마 전 지옥 고지를 받은 두 아이의 엄마, 박정자가 공포에 떨며 지옥 시연을 기다리고 있다.
새진리회 지도자들과 취재진, 주민들에 둘러싸여
구경거리가 된 박정자를 지원은 넋 놓고 바라본다.
박정자가 앉은자리에
자신이 앉아있는 모습을 떠올려 본 걸까?
박정자만 뚫어지게 바라보는 지원의 눈빛이
어느 순간 애처로워 보인다.
자신에게 곧 닥쳐올지도 모르는 지옥 시연이
공포스러워서 짓는 표정이 아니다.
지원을 둘러싼 아우라는 박정자의 그것과 다르다.
눈물, 콧물 쏙 빼며 사시나무 떨 듯 멘탈이 나가버린
박정자의 공포 같은 것이 아니란 말이다.
슬프면서도, 뭔가를 바라는 듯한 염원 같은 게 느껴지기도 한다.
당최 꼭 집어 말할 수 없는 그녀의 표정이다.
그런데, 그게 무엇인지 곧 드러난다.
갓 태어난 신생아가 지옥 고지를 받은 사건을 통해서.
새진리회는 죄 때문에 지옥 고지를 받는다고 했는데,
갓 태어난 아기가 대체 무슨 죄를 지을 수 있단 말인가?
기존 교리와 위반되는 아기 고지 사건은
새진리회에 위기를 가져왔고,
새진리회를 추종하던 화살촉의 견고한 믿음엔
돌을 던지는 일이었다.
아기에게 지옥을 고지한 신의 의도는 무엇인가?
새진리회는 발 빠르게 대처해야 했다.
곧 의심을 잠재울 해석이 나왔다.
갓 태어난 아기가 지옥 고지를 받은 건 부모의 죄 때문이며, 그럼에도 아기가 살아난 건 마지막에 회개한 그 부모가 스스로 지옥불에 뛰어든 행위로 죄 사함을 받게 된 거란다.
새롭게 등장한 교리는 그녀에게 구원으로 다가왔다.
지원은 무릎을 친다.
지옥불에 동참하기로 결심한다.
지원은 자신을 죄인이라고 확신한 상태다.
뱃속의 아기를 지키지 못하고 죽게 만든 죄인.
몇 년을 죄책감에 시달려온 그녀는
지옥불에 몸을 던져서라도 속죄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마침내 그날 그 시,
당일 그 순간의 지옥 시연은 어느 시민의 것이었지만
햇살반 선생은 마치 자기가 시연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지옥불로 과감히 뛰어든다.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모습에 공포 따위는 없다.
흡사 전의를 불태운 전사의 모습이다.
육체가 불에 태워지는 고통은
희한하게도 사라지는 느낌이 아니라
다시 살아나는 느낌이다.
그 뜨거운 희열이 절정을 향해 가며 포효할 때,
갑자기 햇살반 선생은 맥이 쑥 빠진다.
남편이 그녀를 불구덩이에서 빼낸 거다.
불타오르다 만 한쪽 팔에서 지옥 열기가 피어오른다.
살 타는 냄새가 감미롭다.
녹아내려 뭉개져버린 그을린 살덩이가 아름답다.
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끌어내릴 수 없다.
마음에서 터져 나오는 기쁨을 도저히 막을 수 없다.
신이 내 죄를 용서하셨다!
내가 용서받았다!
정말 그녀는 자신이 신에 대해 죄를 지었고,
그렇기에 신에게서 용서를 받고 싶었던 걸까?
아니다.
그녀의 의식 저 깊은 곳엔 신이 아니라
아기에 대한 죄책감으로 가득 차 있다.
아기에 대한 죄의식을
신에 대한 죄의식으로 착각하고 있는 거다.
그녀가 신으로부터 받고 싶었던 용서는
아기에게서 받고 싶었던 용서였다.
새진리회 교리의 종교적 적법성을 떠나,
그것이 아무리 허무맹랑한 소리일지라도,
어쨌든 그들의 교리는
아이를 지키지 못한 어미의 죄책감으로부터
그녀를 해방시켜 주었다.
아이가 내 죄를 용서했어!
내가 용서받았어!
그것이 착각일지라도
이제 그녀의 말대로 용서를 받았으니,
예전처럼 일상으로 돌아가면 되지 않을까?
아뿔싸.
그녀의 죄가 그녀의 맘속에서 비롯된다는 걸 간과했다.
무엇이 죄라는 걸 어떻게 사회적 법 시스템 안에서만
규정할 수 있을까.
사법, 형법에 대한 위법이 아니더라도
내 양심에 죄라고 여기면 죄인 거다.
어느 평화로운 오후,
직장 근무 중이던 남편의 휴대폰으로 지원의 문자가 날아온다.
오빠, 나 또 죄를 지은 것 같아.
시연에 참여해야 할 것 같아.
아기가 과연 날 용서한 건지, 의심이라도 일어난 걸까?
아님, 고의가 아닌 실수로 또 다른 종류의 죄를 지은 걸까?
내 양심에 조금이라고 거리끼는 게 생기면
지옥 고지를 받을지도 모르다는 공포심이 그녀를 사로잡은 걸까?
그녀뿐 아니라 이제 세상 사람 모두
평생을 공포에 떨며 살아야 한다.
신이 언제 무슨 일로 나를 못마땅하게 여길지 모를 일이다.
이들이 신을 추종하는 이유는 단 하나,
지옥에 가고 싶지 않아서다.
이들에게서 신에 대한 사랑을 어찌 느낄 수 있을까.
신을 사랑해서 믿는 게 아니라
무서워서 믿는 게 얼마나 끔찍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공포를 교주들이 어떻게 이용해 먹는지,
어디 드라마만 보여 주던가.
여전히 사이비가 판을 치는 세상이다.
그래서 지옥이 펼쳐지고 있는 세상이다.
신에겐 용서를 잘도 구하는 사람들.
과연 자기가 상처 준 사람들에게도
용서를 구하고 있는 걸까.
신을 보기 전에,
그리고 신을 보면서도,
자기 심연을 봐야 한다.
마음 상태가 어떠한지,
자기 이해가 먼저다.
자기 모습을 들여다보지 않고
신만 바라보게 될 때,
법과 상식이 통하지 않고,
인간성이 결여된 광신도가 될 수 있다.
자기 객관화와 자기 성찰이 빠진 채
신의 긍휼과 은혜만 바라게 될 때,
신념은 서서히 광기가 되어간다.
신의 선택과 은혜 속에 있는 나만이 옳고
네가 틀린 게 되는 거다.
그 교리가 그 자신에겐 구원이 될지 몰라도
측근들에겐 지옥을 선사하는 거다.
만일 햇살반 선생의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던
유산의 아픔을 남편이 알아차렸더라면
그래서 정신과적 치료를 잘 받았더라면
그녀의 운명이 달라졌을지 모른다.
신을 보기 전에, 그리고 신을 보면서도
자기 이해가 먼저 되어야 하는 이유다.
물론, 이 세상엔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순결한 믿음의 소유자들도 많다.
그렇다면 그가 진정한 신자인지,
신념이 광기로 변질된 경우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가 사람에게 하는 것을 보면 안다.
예수님은 이웃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하는 거라고 했다.
이것만큼 신념과 광기를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