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드니 자다가 꼭 한 번은 화장실을 가기 때문에 어딜 가나 화장실 가기 편한 곳에 침대를 정하게 된다.다행히 화장실은 문 열면 바로 앞에 있고, 문 가장 가까운 곳 아래쪽 침대가 내 침대.
문제는 어제 오후 늦게 로카텔리 산장에서 마신 커피와 저녁 먹으며 마신 맥주 한 잔.여행 중에는 되도록 오후엔 커피를 안 마시는데 어제 로카텔리에서는 분위기에 취해 커피를 한 잔 마셨다.12시 넘도록 잠은 안 오고 화장실을 세 번씩이나 들락거리느라 침낭라이너 코쿤 속에서 매번 빠져나왔다다시 휘잡고 들어가다 보면 뒤집혀있기 일쑤고.. 다른 사람들 깰 까봐 화장실 한 번 다녀올 때마다 어찌나 신경이 쓰이는지... 겨우 잠들었다가 다시 새벽 4시 반쯤부터 깨서 또 화장실. 결국 6시에 일어나 화장실 다녀오고 씻고는 7시 조식 전 밖에 나가니 구름이 건너편 암봉을 도넛처럼 휘감고 있다.
아침도 어제 만난 일행들과 함께 먹고, 오늘 그냥 자기네 팀에 섞여 트레치메 디 라바레도를 같이 걷자기에 그러기로 했다. 8시에 모여 난 먼저 출발하고 라바레도 산장쯤에서 잠시 비가 오길래 판초를 쓰고 조금 올라가다 보니 그쳤다. 로카텔리 산장에 먼저 도착해서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오길래 어찌 된 건가 했더니 비가 오기 시작하니까 라바레도 산장으로 들어가는 걸 봤단다. 알타비아도 걸은 사람들이 고만한 비에..ㅋ
도로가 없는 라바레도 산장부터 로카텔리산장까지는 이 작은 차로 물자를 수송한다
오전 일찍 출발한 터라 로카텔리에서 점심을 먹기는 이르고, 우중충하고 쌀쌀한 날씨에 테라스에 앉아있을 수도없고, 어제와 달리 여기도 날씨 때문에 사람도 별로 없고 스산하다. 어제와 반대방향으로 아우론조에서 라바레도 산장 쪽으로 걷기 시작해서 로카텔리에 도착하면 돌아올 때는 로카텔리에서 Langalm 쪽으로 걷게 되는데 어제 걸었던 방향보다는 이 방향으로 도는 게 확실히 편하다. 어제는 반대방향으로 걸으니 처음엔 사람이 없어서 좋았는데 나중엔 반대편 방향에서 오는 사람들이 워낙 많아 서로 길을 피해 주느라 그도 일이었다.
돌아오다가 내가 어제 걸었던 방향 쪽에서 걸어오는 혜초여행팀 두 팀을 만났다.
혼자 오셨어요? 반기며 다들 엄지 척! 응원해 주니 참 고맙다.
오늘은 아우론조산장의 그 큰 주차장도 텅텅 비었다.미네스트로네 수프만 주문해서 아침에 싸둔 빵으로 점심을 먹었다. 오후가 되어도 하늘은 개일 기미를 안 보이고, 오히려 비가 세차게 내리기 시작한다. 오늘 오후엔 어제 못 간 Cadini di Misurina Viewpoint까지 걸어갔다 오려고 했는데 구름이 하늘을 덮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겠기에 아직 너무 이르지만 일단 씻고 전기장판을 켜고 누웠다. 이런 날은 뜨끈뜨끈한 전기장판에 등 대고 누워 쉬는 게 최고지. 날이 개일 때까지 누워나 있자.
2시부터 누워 책 보다, 눈 감고 쉬다가, 일기 쓰다,핸드폰 들여다보다 하다 보니 6시 40분. 밖은 내내 비가 오락가락.. 다시 나가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근데 아직도 내 방엔 아무도 없다. 혼자 자면 좋겠다~
그렇게 떠들썩하고 재미나게 함께 밥을 먹던 일행들이 떠나고 오늘은 혼자 내려가 저녁을 먹으니 좀 허전하다. 좋은 사람들과 만나 함께 있다 떠나보내고 혼자 남으면 홀가분하기도 하지만 쓸쓸할 때도 있다. 오늘은 날씨까지 안 좋아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오후 내내 산장 안에만 있으니 기분이 가라앉는다.
내 방엔 늦게까지 아무도 안 들어오는 걸 보니 오늘은 날씨가 안 좋아 산장이 비었나 보다 싶어 안심하고 전기장판을 꽂은 채로 그냥 그렇게 잠들었는데 한 밤중 방문 열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일어나 전기장판 코드부터 홱 잡아당겨 뽑았다. 방 문 바로 옆에 있는 유일한 콘센트는 내 쪽에서 코드를 꽂아놓으면 문을 열 때 코드가 걸리는데, 종일 아무도 없이 혼자만이어서 그 하나밖에 없는 전기코드를 전용으로 쓰는 호사를 누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