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하 Aug 29. 2024

텍스트 에피소드 2

생명체의 힘


나는 잠든 고양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때, 처음으로 느낀 어떤 것이 서서히 온몸에 차 나갔다. 그 '어떤 것'은 무언가 이제 이걸로 완전 오케이, 같은 기분이었다. 인제 아무것도 필요 없어, 이것만으로 좋아, 하는 만족감, 당연하지만, 고양이가 자는 숨소리를 듣고 자는 얼굴을 보고 있어도 고민은 해결되지 않는다. 내일이 되면 또 바라는 것이 잔뜩 생긴다. 그래도 지금, 아, 이 순간만큼은 정말로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이 느낌, 기존의 말로 한다면 '너무 행복해'에 가장 가까울 것 같다.


가쿠다 미쓰요의 『이제 고양이와 살기 이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다』


"어디를 또 저렇게 졸랑졸랑 가는 거야"


내일 구울 빵의 반죽이 한창이던 남편의 말이다. 나는 남편을 잘 안다. 다정함이 깃든 목소리다. 고개를 들어 베이커리 밖을 보니, 그 녀석이 주위를 살피며 지나간다. 베이커리 근처에는 4인 가족부터 들락날락하는 손님들까지 수 마리의 고양이가 살고 있다. 그 녀석이라면, 어쩐지 꼬리도 다른 아이들의 반토막이고 덩치도 작은, 남편의 말대로라면 어느 구석인지 짠한 고양이다.


늠름하고 힘이 가장 세어 보이는(그의 꼬리는 언제나 길게 하늘을 향해 바짝 서 있고 왜인지 어깻죽지와 등의 근육이 울룩불룩하다) 고양이와 그가 종종 괴롭히는 나른한 암컷 고양이(그와 가정을 꾸려 뒷언덕 어디쯤에 보금자리가 있는 것 같다, 정말! 그들 사이에 아이들도 있다), 배가 불록한 늙은 고양이(아마도 사람으로 라면 복수에 나쁜 것이 찼거나 암이라고 우리는 생각하게 되었다), 영악하고 빠릿빠릿하게 눈알을 굴리는 껌정 고양이, 등등등 한적한 곳에 위치한 작은 베이커리 안에서 남편과 나는 고양이들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그리게 되었다. 우리는 고양이들에 대해 무수한 이야기들을 한 셈이다.  

그중 유독 남편의 마음을 말랑하게 하는 그 녀석이 지나가는 참이었나 보다.  


"오빠는 나약한 것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니까"


웃음 섞인 내 말에 남편은 본인 마음이 원체 여리다는 둥 실없는 소리를 한다.


하지만, 실제로 남편은 나의 유약한 면을 사랑했다고 했다. 강인하고 홀로 뚝딱 알아서 하며 소소한 생활 장면에서 만능 해결사인(그렇다, 그렇지 못함이 나의 콤플렉스이다), 그런 여자를 만났으면 당신도 조금 더 편했으려나? 자조하면 그는 늘 그렇게 이야기해 줬다. 그럼 나의 마음에 스르르 안도감과 온기가 퍼졌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나 역시 그 녀석을 편애하는 마음으로 귀엽게 바라본다. 나약한 것, 그러니 내 남편의 애정을 받지, 쓸데없는 소리를 하면서.


생명체의 힘은 도무지 얕잡아 볼 수 없다.


오늘처럼 함께 일을 하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베이커리 밖의 생명체의 움직임을 좇는다. 장난스러운 녀석이랑은 에메랄드 같은 눈빛과 대치해 나 홀로 눈싸움을 벌이다 웃으며 돌아서고, 늠름한 녀석이 다리를 절룩거리며 나타나 한동안 눈에 띄지 않았던 때에 역시 맹수의 우두머리들은 상처를 입으면 몸을 숨겨 회복한다더니… 하며 걱정반 농담반 남편에게 가벼운 말을 건네기도 한다. 이런 순간들에 내 감정과 기분은 어떠냐면, 묘하다. 그 옛날의 슈퍼마리오 게임에서 마리오가 빨간 버섯을 하나 먹으면 경쾌하게 깡충 +10, +20, 점수가 올라가듯이. 내 마음속 어떤 게이지가 +10 깡충, 하고 소소하게 채워진다. 모두들 오해할까 봐 밝히는 건데, 나와 남편은 딱히 애묘인도 애견인도 아닌 쪽이다. 우리는 그저 살아 숨 쉬는 다른 존재를 향해 무연하다 할만한 시선을 보내는 것이 고작이다. 그러니 스스로도 어리둥절, 생명체의 힘이란 참 대단하구나 하고 생각할 뿐이다.  



튤라가 도착하고 며칠간 이 기적을 한껏 즐겼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쌕색거리는 강아지의 숨소리를 들었고, 침대 옆에 놓인 개집 안에서 나를 바라보는 녀석을 두 눈을 뜨고 가만히 바라보며 "맙소사, 여기 강아지가 있다니!"라고 중얼댔다. 그렇게 하루를 시작했다. 처음 세상을 마주한 모든 강아지는 경이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 딸꾹질하는 강아지의 숨결에서는 햇살 냄새가 난다. 자기 그림자를 쫓아다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심장이 아플 지경이다. 여느 강아지의 커다란 머리, 사슴 같은 눈, 바로 그 사랑스러움은 먹이 본능만큼 생존에 필수적이다.  


게일 콜드웰의 『어느 날 뒤바뀐 삶, 설명서는 없음』


 

하지만 함께 사는 집에, 우리 둘을 제외한 다른 생명체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에게 생명체이다. 나 아닌 상대방을 바라본다. 지금 어떨지 추측도 해본다. 눈곱을 떼어주고 소파에 앉아 서로의 손가락 발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상대방의 잠든 모습에 마음이 울렁거리기도 한다. 물론, 남편이 명언을 하기는 했다. 잠든 상대방의 모습이 애잔한 것은 그대가 말이 없기……때문이라는. 어쨌든, 내가 지금 하고자 하는 말은 '어떤 생명체'의 필요성에 대한 것이다. 어떤 존재라도 상관없지 않을까, 나 외의 살아 숨 쉬는 존재라면.


'이것만으로 좋아, 하는 만족감',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심장이 아플 지경'을 선사하는  생명체의 힘은 아름답기까지 하니!

그 존재는 살아 숨 쉬어야 한다. 휴대폰만 바라보며 딱딱한 곳으로 파고들지 말고, 잠시라도 틈을 내어 살아 숨 쉬는 생명체를 바라보자.  +10 깡충, 채움이 일어난다니까.


 

덧붙이는 말이 있다면:  


애묘인이라면 가쿠다 미쓰요의『이제 고양이와 살기 이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다』,

애견인이라면 게일 콜드웰의 『어느 날 뒤바뀐 삶, 설명서는 없음』, 읽어보시기를 권하고 싶다.

빛이 스며들고, 마음이 뻐근해진다. 아, 아름다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