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풍요롭게 하는 길 - 일곱번째 이야기
첫 직장 입사 2년차 때의 일이다. 나는 당시 이미지나 비디오 파일들을 텍스트가 아닌 이미지 기반으로 검색하거나 자동으로 요약하는 AI 기술을 개발했었는데, 운좋게도 MPEG이라는 국제 표준화 기구에서 해당 기술 표준을 제정하던 때라, L사 대표 참가자 자격으로 국제 표준화 활동에 직접 참여하게 되었다.
MPEG 표준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MPEG4, MP3등 멀티미디어 코덱 및 프레임워크 표준을 제정하는 활동으로서, 국제 표준화 기구인 ISO/IEC 산하 JTC1 작업그룹에서 주관한다. 당시에는 세계 각국을 돌아가며 연 5회 정기 미팅을 약 1주일씩 진행하였고, 매 회마다 수요일에는 주최국의 문화를 알릴 수 있는 연회(Banquet)가 열렸다. 내가 참여했던 3년여간 서울에서도 2회 개최를 했다.
처음에는 그저 해외 출장을 갈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너무나도 설레고 기뻤다. 게다가 약 40여명의 각 기업인, 정부기관 및 연구소, 교수님들로 구성된 대한민국 참가자들은, 출국 전과 회의 기간 동안 현지에서, 정부 기관의 주도로 한국의 이익을 위해 긴밀하게 소통하는 등, 대한민국 대표라는 자부심도 크게 다가왔다.
하지만, 현실의 무게는 나의 각오를 넘어선 그 이상이었다. MPEG 표준화 회의 기간에는 수십개의 소그룹 회의가 동시에 진행된다. 정기 미팅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5일이지만, 미팅이 시작되기 전 주말인 토/일 양일간 AdHoc Meeting이 비공식적으로 하루 종일 열리고, 정규 미팅 기간에도 경쟁 관계에 있거나 협업 관계에 있는 기업들끼리 정식 스케쥴 이외의 조식 시간이나, 저녁 식사 시간에도 만나서 열띤 논의와 싸움(?)을 치열하게 벌인다. 아침과 저녁, 심지어 주말도 없는 타이트한 스케쥴 때문에 힘든 것은 아니었다. 나에게 있어 가장 버거웠던 것은 바로 ‘영어” 였다.
첫 미팅을 경험하기 직전만 해도, 나는 나의 미천한 영어 실력이라도 손짓 발짓 해가며 소통한다면 다 극복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게다가 이미 대학원 시절에 영어 프리젠테이션도 몇 번 해본 터이고, IT 영역에서는 원래 대부분의 단어가 영어라서 일반 대화보다 원할한 영어가 가능할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영어로 인한 중압감은 그 이상이었다. MPEG 회의장은 학술회의장 같은 곳이 아니다. 서로 자기의 기술을 표준 기술로 채택시키기 위해 강하게 주장하고 싸우는 곳이다. 서로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자기 주장을 얘기할 뿐 아니라 가끔 언성도 높이는 공간에서, 제대로 영어를 구사할 줄 모르는 내가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그나마 내가 남에게 말할 때의 부담감은 좀 나은 편이다. 어찌되었든 상대방이 이해할 때까지 반복적으로 말하거나 정 안되면 메일로라도 써서 얘기하면 되니까. 가장 큰 문제는 내가 그들의 말을 다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솔직히 그 당시에는 절반도 못알아들었다. 중요한 내용의 경우, 열띤 논의가 지난 후에 좀 편하게 지내는 타 기업 참석자에게 잠깐 시간 내달라 하고는 내가 이해한 것이 맞는 지 되묻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단 한순간도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고 긴 하루를 보내고 나면 매일 녹초가 되었다. 호텔에 돌아와서도 다음날 있을 논쟁을 준비하고자 한국과 연락하며 새로운 데이터와 자료를 준비하고는 했다. 그래도 주말 포함 9일을 꼬박 힘들게 보내고 귀국할 때는 다시금 자부심과 보람이 그 동안의 지친 몸과 마음을 위로해주었다.
하지만 나의 자존심에 너무나도 크나 큰 상처를 남긴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국제표준화 회의에 참석한 지 약 2년 째의 정기 미팅 때였다. 당시 나는 언어에 약점이 있었던 만큼, 대신 내가 속한 소기구의 의장과 부의장과 친하게 지내려고 노력했다. 일부러 식사도 함께 하고, 쉬는 시간이면 이것저것 물어보며 대신 그들의 바쁜 일손을 자발적으로 도와주기도 했다.
그러자 어느날, 의장이 나에게 해당 분과의 부의장 역할을 제안했다. 당시 부의장은 의장의 회의 진행을 도와 앞에서 회의록도 남기고, 정리가 되지 않는 주제에 대해서는 결론을 이끌도록 돕는 역할을 하던 위치였다. 마음 속에서 영어를 못하는 내가 하기에는 무리라는 소리가 계속 들렸지만, 나는 그 기회를 놓치기 싫어 결국 승낙하고 말았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열심히만 하면 또 어찌어찌 되겠지 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국제 회의에서 어떤 보직을 맡는다는 것은 아예 차원이 다른 일이라는 것을 미처 몰랐다. 나서서 얘기를 해야할 때 제대로 내 역할을 못했고, 정규 회의 후에 내가 해야할 일을 그들이 얘기해 줬는데도 내가 제대로 알아듣지를 못해서 할 일을 못하기도 했다.
결국 그 다음 차수 미팅에서 의장은 내게, 당신이 제 역할을 하지 못했으니 계속 이 역할을 맡길 수 없다는 얘기를 했다. 뭔가 변명과 사과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 또한 내게는 버거운 영어 표현이라 그냥 웃으며 알았다고만 했다. 당시 미팅이 모두 끝나고 귀국하고 나서도, 그 생각만 하면 한 동안 얼굴이 화끈 거렸다. 그리고 그 이후로 의장과 다른 부의장의 얼굴을 보기도 부끄러웠다. 태어나서 이처럼 수치스러웠던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이 또한 지나가리라. 그 뒤로도 나는 약 1년 정도를 더 해당 소기구에서 열심히 활동을 했고, 나름 우리 기업의 특허를 표준화에 포함시키는 결실도 만들었다. 3년이라는 기간 동안 힘들고 부끄럽던 경험을 안겼던 국제표준화 활동은, 다른 한편으로 결코 그 기간이 아니었다면 배우지 못했을 큰 배움도 안겨다 주었다. 그것은 바로 글로벌 무대에서 외국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용기”였다.
나는 그 뒤로도 여전히 영어를 썩 잘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외국인 앞에서 얘기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전혀 없었다. 문법이 맞던 틀리던, 단어가 생각이 안나면 손짓발짓 설명을 하던, 내 의사를 전달하는 것에 대해서는 두려움이 없다. 이는 영어 테스트로도 증명이 되었다. 여전히 듣기가 부족한 나는 3년의 경험 뒤에 치른 토익 시험에서 기대만큼 큰 점수 상승을 맛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말하기 중심의 OPIC 테스트에서는 토익 점수 레벨과는 다른 높은 클래스의 점수를 얻을 수 있었다.
국제 표준화 활동은 내게 영어와 해외 출장 이상의 경험을 주었다. 바로 세상은 너무나도 넓고 경험할 게 넘친다는 새로운 설레임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언젠간 글로벌이라는 거대한 무대에 꼭 도전해 보리라는 마음을 먹게 된다. 이는 결국, 훗날 막연히 대한민국에서 가장 글로벌화가 앞서 있다고 기대한 기업을 찾아 이직을 시도하기도 하고, 현재 몸담고 있는 직장에서 그룹사에 제안하여 유럽에 벤처 기업 설립을 추진하게 된 작은 불꽃이 되었다.
돌이켜보면, 비록 국제 표준화 활동을 시작하게 된 건 운이었지만, 이후 3년간 주도적으로 참여하면서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여러 경험들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은 작은 용기로부터 출발한 나의 의지였다. 만일 나의 영어 실력에 대한 부족함을 객관적으로 판단하여 더이상 부끄러운 일들을 만들지 않겠다는 냉철함으로 일관했다면, 나는 한국 현지에서 국제 회의 참석자들을 서포트 하는 역할로 전환되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의 무모한 도전은 비록 가슴 한켠에 지금도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 거리는 부끄러움을 남겼지만, 그 이상의 가치 있는 경험들과 함께, 전에 없던 용기와 더 큰 삶의 목표를 가져다 주었다.
그래서 나는 자신있게 얘기하고 싶다.
누구든 작은 기회가 온다면, 깊게 생각하지 말고 일단 도전하라.
그 결과가 비록 실패로 끝나더라도, 그리고 그로 인해 부끄러움만 남더라도, 이는 잠시 그 때만 머무르는 사소한 느낌일 뿐, 내 안에 영원히 남을 가치있는 경험과 용기를 얻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