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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말 서재 Sep 07. 2024

세상은 이렇게나 넓은데

삶을 풍요롭게 하는 길 - 여덟번 째 이야기

첫 직장에서의 국제 표준화 활동 경험 덕분에, 나는 비록 공항과 호텔만을 주로 오갔더라도, 유럽, 아메리카, 아시아, 오세아니아 대륙의 여러 나라들을 조금씩이나마 경험하는 행운의 시간들을 보냈다. 아직 젊은 나이였기도 했고, 당시에는 해외 여행이 그리 흔하지 않던 시절이라, 나의 해외 경험은 더욱 특별할 수 밖에 없었다. 그 경험이 내게 남긴 것은 여러 나라의 아름답고 이국적인 풍광만은 아니었다. 바로 이 넓은 세계가 나의 무대이고 싶다는 새로운 바램도 함께 남겼다. 


국제 표준화 기구 특성 상, 전 세계의 다양한 학계, 기업에 소속된 기술자들이 모여 본인들의 기술을 표준으로 채택시키기 위한 목표 하에 끊임없이 다양한 기술들을 논의하고 경쟁한다. 비록 정규 회의 기간 동안에는 대부분의 시간을 서로 경쟁사의 입장에서 언성을 높일만큼 격한 논쟁을 하면서 보내지만, 한편으로 저녁시간에 식사 자리라도 마련되면. 같은 분야에 종사하는 개인으로서 서로 공감하고, 자신들의 삶을 공유했다. 각 나라마다 문화도 틀리고 음식도 틀리고 기업관도 달랐다. 그 다름 자체가 나에게는 너무나도 흥미로웠고, 나에게 주어진 삶의 기간동안 이토록 다양하고 흥미로운 세계를 경험해볼 수 있다는 기대가 나를 벅차게 했다. 이후로 나는 막연히 언젠가는 세계로 진출해 일하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된다. 하지만 지금과는 달리 그 시절만해도, 외국에서 무언가를 해보겠다는 결심을 그리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대기업이라고 해도 해외 진출의 기회가 그리 많지도 않았다. 


국체 표준화 미션이 끝난 이후로는, 가끔씩 기술 발표나 리서치 차원에서 해외에 나갈 기회는 있었으나, 글로벌 경험이라 할만한 기회를 좀처럼 잡지는 못했다. 나 스스로도 당시의 다짐을 조금씩 잊기 시작했고, 그렇게 15년 넘게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다.


나이가 마흔 중반을 넘어가자 문득 더 늦기 전에 글로벌 시장에서 기회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하지만 방법을 몰랐다. 가장 확실한 것은 내가 직접 글로벌 사업을 추진하는 기업을 창업하는 것인데, 그러기에는 두 자녀를 둔 가장으로서 리스크가 너무 크고, 타고난 성격 상 엄두도 못낼만큼 용기도 없었다. 외국 기업에 취업을 시도하는 것 또한, 한국에 입주한 글로벌 기업은 대부분 직무가 영업에 치중되어 있어 맞지 않았고, 해외 본사에 취업하는 것은 난이도가 매우 높을 뿐 아니라 가족 모두가 함께 움직이기에는 이미 자녀들이 훌쩍 커버린 뒤였다.


결국 나는, 나의 의지만 있다면 창업이 아닌 월급쟁이더라도, 내가 직접 글로벌 사업을 추진해 볼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높다면 나름 괜찮은 대안이라고 생각을 바꾸었다. 당시 내가 몸담고 있던 텔레콤 기업은, 사실 지금까지 경험한 직장 중에서 직장인으로서는 여러 측먄에서 가장 환경과 조건이 좋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늦기 전에 글로벌 진출을 시도해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 나는 기존 직장을 과감히 떠나 내 자신이 주체가 되어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금전적인 측면이나 사회적 위상 등 일부를 포기한 대신, 지금 몸담은 IT기업으로 옮기면서 내가 직접 내 전문 분야에서의 기술 사업을 이끌고 싶다고 제안했다. 다행히 계획했던 것처럼, 현재 몸담고 있는 기술 사업을 영위하는 계열사의 대표이사를 맡아, 기존 사업을 발판으로 사업을 확장해서 글로벌로 진출하고자 하는 꿈을 키워 나갔다.

결국, 마음이 하늘에 닿았을까.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지 약 3년만에 정말 소설같은 우연이 내게 찾아왔다. 


영국의 한 상장 기업이, 한국 시장에서 데이터 사업을 위해 파트너사를 물색하다가,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나에게 인연이 닿았다. 그 영국 기업의 창업자께서는 나이가 나보다 훨씬 많은 분이지만, 나보다도 더 활기와 열정이 높아 보이셨다. 국적과 나이를 넘어 서로의 생각과 지향점이 잘 맞는 서로는, 단순히 데이터 제휴를 넘어, 우리가 보유한 기술력과 영국 기업이 보유한 유럽에서의 사업 역량을 통해, 글로벌 기술 플랫폼 서비스를 해보자는 생각으로 발전시켰다. 그리고는 2020년 1월에, 드디어 나는 사업 가능성을 살피기 위해 영국과 이탈리아로의 출장길에 오른다. 그리고 귀국 후 약 3개월만에, 그 영국 회사와 내가 속한 그룹사는, 데이터 플랫폼 서비스를 제공하는 영국 소재의 조인트 벤처를 함께 설립했다. 모든 과정이 일사천리였다. 시차가 다른 두 지역의 기업이 함께 빠르게 설립 절차를 진행했던 만큼, 해당 기간동안에는 잠도 제대로 잔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렇더라도 내가 그리 꿈꾸던 글로벌 사업을 드디어 시작한다는 설레임에 힘든 줄도 몰랐다.


그런데 소설같이 다가온 기막힌 우연은, 다시 소설같이 찾아온 전례없는 악재를 만나고 만다. 공식 설립일을 맞이하기도 전에 전셰계를 덮친 COVID19 팬더믹은, 한국과 영국, 그리고 이탈리아로 흩어져 있는 구성원들에 의해 성장해나가야 했던 스타트업의 발목을 2년이 넘도록 잡고 말았다. 결국 설립 전에 방문했던 출장이, COVID 19가 창궐했던 2년 간의 처음이자 마지막 출장이 되었고, 전혀 상상도 못했던 전 세계에 불어닥친 전염병의 공포는 그렇게 나의 느즈막 도전을 막아 세웠다. 


2년 넘짓 지나고 나서야, 각종 서류와 마스크를 채비한 채, 영국과 이탈리아를 다시 방문할 수 있었다. 비록 늦었지만 부지런히 재정비를 하고 나서야, 우리가 출시한 서비스도 조금씩 고객이 알아주고 사용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뒤늦은 성장은, 2년이라는 공백 기간 동안 큰 성과 없이 소요된 비용을 메꿀 만큼 충분하지는 못했다. 결국 아쉽지만 나의 첫번째 글로벌 도전은, COVID19 팬더믹과 함께 시작해서 COVID 팬더믹의 완전한 종식 직후에 정리되었다. 돌이켜보면, 한번도 상상해본 적도 없는 COVID19와 같은 악재가 하필 그 타이밍에 발생하여, 잠깐이나마 부풀어 있던 나의 기대를 물거품으로 만든 상황 자체가 일장춘몽 같았다.  


비록 나의 첫 글로벌 도전은 허무하게 실패로 끝났지만, 그로 인해 배운 것이 더 많았다. 다시 도전한다면, 처음부터 고려해야 할 국가별 특성들과 잊지 못할 다양한 현지 경험들, 그리고 지금도 네트워크를 이어가고 있는 전 세계의 인연들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한 가쳐였다. 

지금도 내 꿈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언젠가 세계 무대에서 내가 만들어낸 가치를 선보이는 날을 기대하며 오늘도 도전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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