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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말 서재 Sep 08. 2024

감정 필터 노트

삶을 풍요롭게 하는 길 - 아홉번째 이야기

보통 상사 복이 없으면 동기 복이 있고, 동기복이 없으면 상사복이 없다고 했던가? 보통 누구에게나 힘들게 느껴질 만한 독한 상사를 만나면, 그 밑에서 함께 일하는 구성원들 간에는 그 상사를 안주 삼아 똘똘 뭉치기 마련이어서 오히려 동기들끼리는 돈독한 경우가 많다. 그런데 운좋게 좋은 상사를 만나면, 반대로 동기나 같이 일하는 동료 직원들 중에 꼭 한두 명씩은, 동료를 반드시 제껴야 할 경쟁자 정도로 여기고 사사건건 불편하게 하는 이들이 생겨나기도 한다.


상사와 맞지 않거나, 동료들 중 불편한 동료가 있을 경우, 자기개발 서적에서 흔히 얘기하듯이 나만 잘하면 그 관계가 드라마틱하게 변할 수 있을까? 적어도 내가 사회 초년생이던 시절에는 그리 현명한 대처를 하지 못했기에, 실제로 그러한 조언들이 현실에서 효과가 있을 지는 나도 모른다. 오히려 나의 경우에는, 그러한 동료에 대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식으로 대했다가 관계가 더 악화되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얼굴이 화끈거릴 만큼 부끄럽고 참으로 못난 대처였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그 이후에 맺어진 관계들에 있어서는 보다 다양한 사람들을 지혜롭게 수용할 그릇을 준비할 수 있었다. 여기서 수용한다 함은, 나와 맞지 않는 어느 누구와도 잘 지낼 수 있는 마음의 그릇이 생겼다는 의미가 아니다. 여전히 나는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불편하다. 다만 그들을 대할 때, 나와 그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생각이나 나의 감정을 중심에 놓지 않고, 가능한 일의 관계나 객관적 사실만으로 생각하고 대응함으로써, 감정이 대화를 지배하지 않으면서 내용에만 집중하는 대확가 가능하게 되었다.


사람 성격은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인데 어떻게 불편한 감정을 그대로 품은 채, 감정을 배제한 객관적인 관계와 대화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을까? 나는 석사과정에서 뇌과학에 대해 배울 기회가 있었다. 심리학은 아니지만, 뇌가 작동하는 흐름을 과학적 시각에서 이해하고 이를 활용한다는 점에서, 뇌과학은 일정 부분 심리학이나 대화/코칭 영역에서 다룰 법한 인관 관계에 대한 내용들과도 관련이 있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감정적으로 흥분 또는 적대시하거나, 반대로 필요 이상의 호감을 갖는 뇌 안에서의 흐름을 강제적으로 변경함으로써, 순간적인 감정적 반응을 최대한 자제할 수 있다. 아마 심리학 등에서 이를 가리키는 전문 용어가 혹시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나만의 이 방식을 “감정 필터 노트”라고 부르기로 했다.  


흥분하지 않는 대화의 기술 - “감정 필터 노트”


사람이 대화를 할 때는 대화의 내용 자체 뿐 아니라, 이미 앞선 대화의 문맥이나, 상대방의 표정, 이미지, 기존 관계 등 복합적인 요소를 반영한 채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이해하게 된다. 거기에 상대방의 톤이 공격적이냐, 상냥하냐에 따라 듣는 이는 같은 내용의 대화라도 다른 해석과 의도로 이해될 수 밖에 없다. 이는 뇌가 대화를 해석하고 반응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 모든 입력 요소들과 문맥을 종합적으로 활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이러한 자연스러운 이해의 흐름을 강제로 변경하면 어떻게 될까? 우선 상대방이 하는 이야기를 평상시처럼 바로 듣고 이해하는 대신에, 머리속 상상의 노트에 한 번 상대방의 이야기 한 문장을 먼저 빠르게 적어보자. 그리고는 노트에 씌어진 텍스트를 마치 책을 읽듯이 읽어보자. 단순히 노트에 씌어진 텍스트를 읽을 때에는, 누가 그 이야기를 한 것인지, 혹은 상대방이 어떤 톤과 제스추어를 사용했는 지가 배제된 채, 텍스트로 표현된 이야기의 의미 자체에 집중하게 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상대방에 대한 감정 대신에, 현재 오가는 대화 내용만으로 나의 다음 답변을 논리적으로 얘기해 나갈 수 있다.  


처음에는 이러한 방식을 시도하려고 하면, 상대방 이야기에 바로 답변하지 못하고 잠깐 동안의 지연이 생기거나, 가끔은 상대방이 무슨 얘기를 했는 지 놓치기도 하는 등 어색할 수 있다. 하지만 조금만 반복해서 습관화하다 보면, 어느 순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귀로 듣는 동시에 머리 속에서 이를 쓰고 다시 읽는 과정이 이루어진다.  


감정 필터 노트를 사용하는 잇점은 단지 흥분 하지 않고 차분하게 얘기할 수 있다는 장점 이외에 더 중요한 부분이 있다. 어찌보면 대화 과정에서 너무나도 당연한, 상대방의 이야기를 왜곡 없이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점이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상대방의 관계가 좋지 않거나 이미 감정적으로 대화할 준비가 되지 않았을 경우에는, 상대방의 이야기 포인트를 놓치거나 혹은 본인도 모르게 왜곡하여 이해하는 습성이 있다. 이는 뇌가 “저 사람하고는 긍정적인 이야기가 될 수 없는 관계야”, “저 사람이 합리적인 이야기를 할 리가 없어” 라며 이미 내 자신이 만들어놓은 프레임에 가능한 맞추어 이해를 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감정 필터 노트라는 마음속 노트에 상대방의 이야기를 적어 텍스트로 표현한 후 다시 이를 읽어 내려감으로써, 우리는 감정선을 배체한 채 상대방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정확히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즉, 뇌가 상대방 이야기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여러 복합적인 요소에 의해 감정이 개입되는 흐름을 한 번 차단하고, 대신 다른 방식으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이해함으로써 제 3자적 시각으로 대화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감정필터 노트는 직장에서의 상하 관계에 있는 상호 대화에서도 도움이 된다. 보통 한참 차이가 나는 상사와 이야기를 할 때는 누구나 긴장하기 마련이다. 조금만 상사가 언성을 높이거나 (설사 좋은 의도라고 하더라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내용의 피드백을 할 경우에는, 사회 경력이 짧은 초년생일 수록 주눅이 들고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다. 한번 주눅이 들기 시작하면 상사에게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못하게 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자칫 불필요한 변명을 늘어놓게 됨으로써 더욱 안좋은 인상을 남길 수 도 있다. 이 때에도 감정 필터 노트는 큰 힘을 발휘한다. 상사가 얘기하는 내용을 객관적으로 이해함으로써, 그 순간의 불편함이나 긴장감을 배제한 채 상사가 전달하고자 하는 포인트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정확한 이해와 긴장하지 않은 마음은, 상사에게 본인의 향후 개선 계획이나 생각을 정확히 답변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러면 상사는, 자신의 피드백을 정확히 받아들이고 앞으로의 계획을 논리적으로 얘기하는 후배가 더욱 믿음직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이와 같이 감정 필터 노트는 상사와의 대화에서 기본적으로 깔고 가는 두려움, 불편함, 긴장감이 대화의 본질을 흐리게 만드는 것을 차단하고, 대화 자체에 집중하도록 도와준다. 상사나 선배 입장에서도, 피드백하는 와중에 후배 사원이 너무 긴장해서 불편해하는 것이 느껴지면, 더 이상의 피드백을 이어가기가 불편해진다. 이러한 상황이 반복될 경우, 그 후배 사원에 대한 기대치도 낮아질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내가 중간 관리자 위치에 있을 때, 감정 필터 노트의 덕을 크게 봤다. 당시 성격이 불같아 대다수가 무서워 하던 어느 높으신 분이 계셨는데, 나는 그 분과 상대적으로 편하게 대화할 수 있었고, 나중에 다른 분들을 통해 들은 이야기이지만 그 분도 그런 나를 유독 신뢰하셨다고 한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 좋아하는 사람 등 여러 관계와의 대화에서, 단순히 말 자체 뿐 아니라 분위기, 행동, 표정 등 복합적인 수단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대화 방식이며, 대화를 보다 풍성하게 만드는 인간의 능력인 만큼, 일반적인 경우에는 우리가 하던 대로 대화를 하면 된다. 하지만 직장에서, 특히 불편한 관계에 있는 사람과 대화하거나, 평가 피드백, 과제 리뷰 등 공식적이고 객관적인 대화가 오가야 하는 자리에서는 감정 필터 노트가 도움이 될 수 있다. 특히 본인이 다소 감정이 격한 스타일이라고 생각된다면, 꼭 시도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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