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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말 서재 Sep 14. 2024

마케팅하는 개발자, 개발하는 경영자.

삶을 풍요롭게 하는 길 - 열번째 이야기

최근에는 엔지니어 출신의 CEO가 기업을 이끄는 스타트업들이 많이 눈에 띈다. 뿐만 아니라, 중견기업, 대기업조차도 IT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과거에는 보기 힘들었던 이공계 출신 CEO들이 등장하고 있다.


내가 주니어이던 시절에 가끔 학술 회의나 국제 표준화 활동을 위해 출장을 가게 되면, 머리가 희끗희끗한 나이든 엔지니어가 백팩 하나 메고 아무 바닥에나 앉아, 무거운 랩탑 하나 펼쳐 놓고 프로그래밍하던 모습이 참으로 멋있다고 생각했다. 나이 들어서도 관리자의 길 대신에 엔지니어로서 전문가로 성장하는 커리어 패스가 흔한 외국 회사들이 부러웠고, 나도 꼭 그리하리라 마음 먹었다.


그런데, 막상 경력이 쌓이면서 내 관점은 조금씩 바뀌어 갔다. 관리자의 길이 더 좋게 보였다는 의미가 아니다. 많은 엔지니어들은 공감하겠지만, 기업에서 쓸모 있는 기술이란 대부분 그 활용 목적으로부터 출발되어야 하고, 대중에 의해 그 쓰임새가 검증되었을 때 비로서 가치가 있다. 수많은 석박사 논문에서 발표되는 발견들 중 상당수가 시간이 지나도 세상에 기여하지 못하는 그 괴리를, 기업에서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따라서 가치 있는 기술을 개발하려면, 항상 그 쓰임새로부터 필요한 기술의 요구 조건이 먼저 정의되어야 하고, 이것이 기술 개발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문제는 기술이란 언제든 한계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비즈니스에서 필요한 요구 조건을 기술만으로 해결하기가 어려운 경우가 있다. 이 경우 기술은 결국 도움 되지 않는 쓸모없는 존재로 결론지어지는 걸까? 그렇지는 않다. 비즈니스 쓰임새와 목적을 정확히 이해하는 엔지니어나 과학자는 그 기술의 한계를 품고도, 대신 비즈니스 시나리오를 조율함으로써 그 기술의 한계를 회피하여, 현실에서 도움되는 기술로 응용할 수 있다.

결국 기업에서 가치있는 기술이란, 현실에서 마주치는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응용기술"이다.


예를 들어보자. 오래전 N사에 근무할 때의 일이다. N사가 서비스하는 포털 사이트에는 보통 사람들이 업로드 하는 수많은 이미지들이 매일 새롭게 노출된다. 이중에서는 자체 규칙에 의해 노출되면 안되는 이미지들도 함께 업로드된다. 대표적인 것이 노출에 적절하지 않은 성인 이미지에 대한 것이다. 당시 N사의 포털서비스에서는 나름의 규칙을 기준으로, 어떤 이미지를 비적절한 성인 이미지로 규정할 지 정하고, 해당 아미지들을 필터링하고 있었는데, 이들 작업은 한국과 중국 등지에서 사람이 직접 눈으로 확인하여 관리를 하고 있었다. 매일 업로드되는 이미지들의 업청난 규모를 고려해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업무에 동원되는 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내가 속한 조직의 미션은 어떻게 이 업무를 자동화할 수 있을지 기술 개발을 하는 것이었다.


AI가 급속도로 발전한 지금이라면 보다 수월하게 자동화 기술을 개발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마 지금도, 99%에 가까운 높은 성능의 자동 판별은 가능할 지 몰라도, 단 하나의 불법 성인이미지라도 놓치지 않는 완벽한 기술은 구현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물며 2000년대에는 지금보다 AI기술이 그리 뛰어나지 않았다.

99%라면 충분히 뛰어난 기술아닌가? 분명 학문적 측면에서는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 같은 학문적 시각에서의 성능 수치의 가치는 비즈니스 시나리오에 따라 유효하기도 하고, 전혀 쓸모 없는 상황이 되기도 한다. 


불법 이미지를 거른다는 의미는, 한두 장이라도 불법 성인 이미지가 미성년자와 같은 대중에게 노출되는 것을 혀용해서는 안된다는 의미이다. 불법 성인이미지가 노출되었을 때의 위험성과 심각성은, 불법 이미지가 아닌데도 불법이미지라 판단하여 노출을 못하게 되었을 때의 위험성과 심각성보다 훨씬 높다. 

보통 AI에서 이미지를 인식하여 구분하는 기술의 성능을 얘기할 때, 흔히 사용하는 정밀도(Precision)/재현율(Recall)이라는 지표가 있다. 위의 케이스를 예를 들어 보면, AI가 이 이미지는 불법 성인 이미지라고 판단한 이미지들 중에서 실제 불법 성인 이미지가 차지하는 비율이 'Precision'이다. 이에 반해, 실제로 존재하는 전체 불법 성인 이미지 중에서, AI가 찾아낸 불법 성인 이미지의 비율을 'Recall'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100개의 조사 대상 이미지 중에 20개의 불법 성인 이미지가 포함되어 있다고 하자.  AI는 25개가 성인 이미지일 것이라고 예측했는데, 이들 중 실제 성인이미지는 15개였고, 나머지 10개는 정상 이미지를 잘못 찾아냈다. 즉 성인이미지일 거라 예측한 25개 중 15개만 실제 성인 이미지였으므로 정밀도는 15/25 = 60%가 되고,  실제로 존재했던 20개의 성인 이미지 중에 15개만 찾았냈기 때문에 재현율은 15/20 =  75%가 된다.


앞서 설명했던 N사의 사례에서는 AI의 두가지 성능 지표인 정밀도와 재현율 중 무엇이 더 중요할까? 불법 성인이미지를 놓쳐서 노출되는 것이 훨씬 심각한 위험을 초래하기 때문에, 실제로 존재하는 불법이미지를 가능한 모두 찾도록 하는 재현율 지표가 정밀도 지표보다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정밀도와 재현율 지표는 AI에서 성능을 튜닝할 때, 어느 한 성능 지표를 높이려면 반대로 다른 하나의 성능 지표가 낮아지는 Trade-Off 관계에 있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정밀도 성능 지표를 포기하더라도 재현율 성능 지표를 매우 높이도록 튜닝함으로써 비즈니스에 기여할 수 있다. 


만일 백만 개의 이미지 중에 단 10개의 불법 이미지가 포함되어 있다면, 사람이 이를 확인할 경우, 백만 개의 이미지를 일일이 모두 확인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만약, 재현율을 100%에 가깝게 튜닝한 AI 기술을 이용해 백만 개의 이미지 중 성인 이미지일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20만 개의 이미지를 골라낼 수 있고, 이 20만 개에 실제 존재하는 10개의 성인 이미지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면 어떻게 될까? 20만 개의 이미지 내에 10개의 불법 이미지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면, 재현율 성능 지표는 100%로 높지만, 정밀도는 0.005%로 형편없어질 것이다. 이는 AI의 일반적인 성능 지표 관점에서는 결코 좋은 성능이라 얘기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 기술을 적용할 경우 적어도 사람이 100만 개가 아닌 20만 개만 직접 확인하면 될 터이니, 기업에서는 비용을 1/5로 줄일 수 있는 획기적인 기술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이 비즈니스 시나리오를 고려한 기술의 응용은, 보통 기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비즈니스 담당자가 먼저 생각해 내기는 어렵다. 일반적으로는 기술 담당자와 비즈니스 담당자가 긴밀히 논의해 가며 이와 같은 접근을 찾아내는 것이 대부분 기업에서 볼 수 있는 협업 모습이기도 하다. 하지만 사람간의 소통, 그것도 분야가 다르고 조직이 다른 두 담당자들 간의 소통이 그리 생각만큼 쉽지는 않기 때문에, 이러한 해결책을 모색하는 데는 시간과 비용이 든다.  만일 기술 담당자가 이러한 비즈니스의 특성을 잘 이해하고 센스까지 보유하고 있는 인재라면, 아마 이와 같은 대안을 비즈니스 담당자에게 먼저 제안했을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아주 명료한 케이스를 예를 들었지만, 기업에서는 이와 같은 과제들이 비일비재 하다. 때문에 비즈니스 담당자 입장에서는 실제 기술의 깊이가 어떨지는 몰라도, 이와 같이 비즈니스를 이해하여 실제로 도움이 되는 솔루션을 제시해주는 기술 담당자가 가장 고마운 협업 관계이자 가장 뛰어난 기술자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기업 입장에서도 기술과 기술자를 바라볼 때, 실제로 기술 부서의 고객이라 할 수 있는 비즈니스 담당자가 생각하는 기준과 크게 다르지 않다.  유행하는 최신 기술을 적용하고 프로그래밍을 깔끔하고 빠르게 완성하는 등의 순수한 기술 측면도 중요한 역량 기준이지만, 결국에는 비즈니스와 사용자가 필요로 하는 포인트를 기술로 해결해 낼 수 있는 응용 능력, 그것이 기업에서 요구하는 궁극의 기술력이 된다. 이는 학교에서 배울 때 학점을 부여하는 기준이었던 스킬과는 다소 다른  관점이다.  얼마나 비즈니스를 이해하려고 하는 지에 대한 태도와 센스가 고유의 기술력과 만났을 때, 진정한 높은 수준의 엔지니어이자 과학자로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비즈니스를 깊이있게 이해하면서 동시에 필요한 기술도 동시에 연마하는 엔지니어가 10년, 20년 동안 경력을 쌓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마 누구보다도 비즈니스를 이해하면서 필요한 기술을 적재적소에 적용할 수 있는 비즈니스 기술 리더가 되어있을 것이다. 만일 그 기업이 생산하는 상품이나 서비스가 IT 제품이라면, 해당 비즈니스를 리딩할 적임자로 이러한 기술자 출신의 리더를 일순위로 기대하게 되지 않을까?  이와 같은 배경에서, 최근 이공계 출신 CEO들의 비중이 과거 대비 높아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데이터가 주로 쓰이는 쓰임새가 마케팅 영역이다보니, 기술 영역 못지 않게 직접 마케팅 세계를 이해하고 경험하는 데 많은 투자를 해왔다. 그러다보니, 점점 전문 영역을 고려해서 스피커로서 참석하는 컨퍼런스 유형들이 기술 컨퍼런스보다 마케팅 컨퍼런스가 많아지는 같다. 


내가 젊었을 때 꿈꾸던 진정한 엔지니어의 모습, 머리가 하얘질 정도로 나이 들어서도 청바지에 랩탑 하나만 있으면 어디서든 프로그래밍을 하는 자유로운 모습 또한, 분명 여전히 가치있는 엔지니어의 모습이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기술 역량을 기반으로 마케터, 경영자로서 비즈니스를 리딩하고 있는 모습 또한, 기술을 통해 세상의 가치를 실질적으로 창출하고자 노력하는, 또 하나의 진정한 기술 리더의 모습이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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