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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말 서재 Sep 14. 2024

어딜 가도 나를 성장시키는 배움은 있다.

삶을 풍요롭게 하는 길 - 열한번째 이야기

대한민국 1등 기업이라고 알려져 있는 S전자로 이직을 결심했을 때에만 해도, 나는 이미 L전자라는 또 다른 대형 제조 기없에서 10년이나 근무를 한 경험이 있었기에, 소위 성과 지향으로 대표되는 S사의 문화에 대해 전혀 두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입사 후 한달도 지나지 않아, 나는 같은 제조업이지만 이들 두 기업의 문화는 참 많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시 S사 내부에서는 우스개 소리로, 각 사업부 별 생산하는 제품 크기에 따라 군대 문화의 강도가 결정된다는 말이 있었다. 내가 속한 사업부는 해마다 사이즈가 커져가는 TV를 생산하던 곳이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분위기도 아주 하드한 편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근무 분위기는 과장 이하의 주니어 직급과 수석/부장 등 리더급 직급이 다르게 느낄 수 있다. 개인적으로 주니어 직급에게는 근무 분위기도 밖에서 보는 것 대비 유연할 뿐 아니라, 배우며 일하기에 정말 좋은 기업이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임원들의 손발이 되어 옆에서 업무적으로 보좌해야하는 리더 직급의 경우에는, 임원들이 느끼는 긴장감을 그대로 함께 하면서, 수많은 이슈들을 매일 시간에 쫓기듯 처리해나가다 보니, 사무실에 있는 동안 업무를 할 때나 회의를 할 때나 별로 웃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사실 S사로의 이직을 결심한 가장 큰 배경은, 글로벌 진출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더 높이고자 하는 바램 때문이었디. 하지만 나의 바램은 이직 후 한 달도 안 되어 뇌 속에서 사라져버렸다. 매일 긴장 속에 하루를 살아가는 나에게 그 따위 한가한 생각을 품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매일 지쳐가는 일상 속에서도, 동시에 한 켠에서는 새로운 배움으로 인한 가슴 벅참을 가져다 준 순간들도 있었다.

스마트폰과 달리, 보통 TV는 신모델 발표 주기가 자주 있지는 않다. 보통은 매년 초 미국 라스베거스에서 열리는 세계 최대의 가전 전시회인 CES 행사에서 신모델을 발표하고, 직후부터 전 세계에서 동시 판매를 시작한다. S사 TV의 경우 글로벌 Top 제품 답게 전세계 200여 이상의 나라에 동시 판매가 시작되는데, 하나의 제품 모델이더라도 각 국가별 요구사항이 조금씩 다르다보니, 개발자 입장에서는 실제로 수십개 이상의 모델이 동시 출시되는 것과 같다. 


한국에서 개발된 다양한 국가별 특화 모델들을 일시에 전 세계로 수출하면서, 출시 초기에 발생할 수 있는 여러 이슈들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까. 

수원에 자리잡고 있는 사옥에는 수백명이 모여 컨퍼런스 회의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출시 직후부터, 제품과 관련된 모든 담당 부서의 수석급 담당자들과 임원이 매주 한자리에 모여, 전세계에서 발생한 한 주동안의 이슈들을 모아 리뷰하고 원인과 대응을 논의한다. 거의 모든 담당부서가 모인 만큼, 대부분의 이슈들은 그 안에 참석한 누군가의 책임 하에 있거나, 혹은 책임 소재가 모호할 때는 조금이라도 관련된 담당자들이 모두 모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머리를 맞대고 이슈를 해결해야 한다. 또한 부서들 간에 책임 공방이라도 있을 지 모르는 리스크를 차단하기 위해, 부서별 임원이 돌아가면서 매 회의를 이끌어가는 의장 역할을 하는데, 일단 그 순간 만큼은 그 회의의 의장이 결정한 내용에 대해 모두가 군소리 없이 따르고 협력한다.


어찌보면 군대처럼 Top-Down으로 돌아가는 시스템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초대형 조직 전체를 일사천리로 움직일 정도의 강력한 시스템이 존재하기 때문에, 거대 규모의 글로벌 상품 품질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물론 그 회의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내게는 상당히 심한 스트레스가 되었지만, 훗날 기술 기업 경영을 하는 데 필요한, 단호하고 빠른 결정 프로세스와 책임/권한에 대한 무게에 대해 배웠고, 또 한번 나를 한 단계 성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돌이켜보면, 큰 배움을 가져다 주었던 경험의 대부분의 순간에는 스트레스 또한 함께 있었다

보통 배움과 성장이란, 내가 익숙해 있지 않은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되어 이를 극복했을 때 성취되는 것이다보니, 그 과정에서 스트레스를 동반할 가능성이 높다. 반대로 편함과 익숙함 속에서 보내는 시간들은 큰 배움을 가져다 줄 계기가 일어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낮을 수 있다. 


충청도에 위치한 속리산에는 헐떡고개라는 구간이 있다. 거의 정상 근처에 다다랐을 때 이미 지칠대로 지쳐있는 상태로 마주하게 되는, 짧지만 고난이도의 구간이다. 이 구간을 지나 조금만 더 오르게 되면 비로소 정상인 문장대에 오르게 된다.

만일 지금 이순간, 쉽지 않은 문제 해결과 성과 달성에 대한 중압감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상황이라면, 살면서 한번쯤 마주하는 고비를 지나 또 한단계 나를 정상에 가까운 위치로 성장시키는 헐떡고개를 오르는 중이라고 생각하자. 혹은 운 좋게 편하고 익숙함 속에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이 또한 잠시 내게 쉬어갈 여유를 준 것이라 생각하고 감사하자. 대신, 너무 오래 감사만 하고 있지는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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