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히지 않을 자기소개서를 쓰며
from. 로스쿨 삼수생
영화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에서 주인공 라라 진은 짝사랑하는 감정을 주체하질 못해 읽히지 않을 편지를 쓰곤 했다. 사랑하는 마음을 그득그득 담아 정성스레 적고는 상자에 담아 서랍 속에 넣어뒀다. 받는 사람에 적힌 이름이 무색하게도 편지는 보내지지 않고 고이고이 서랍에 들어가 있을 뿐이다.
나도 읽히지 않을 글을 쓴다. 로스쿨 입학 자기소개서 말이다. 왜 안 읽히냐고? 1차 전형에서 자기소개서는 안 보고 법학적성시험 점수, 학점, 토익 점수만 본단다. 다시 말해 1차 관문을 통과한 사람들의 자기소개서만 읽는다고 한다. 이 얼마나 편리한 제도인가? 교수님들은 연로하여 눈도 침침 하실 텐데, 점수가 낮아 어차피 떨어질 학생들의 자소서는 읽을 필요도 없다니.
덕분에 내 자기소개서도 안 읽히게 될 판이다. 3년을 준비했건만 시원찮은 점수를 받았으니 말이다. 아니 3년뿐인가? 대학생활 4년 동안 변호사만을 꿈꾸며 온갖 법 관련 활동만을 해왔다. 수험기간을 포함하면 총 6년이다.
취업 준비? 안 했다. 자격증? 없어요. 로스쿨 들어갈 때 자격증은 전혀 필요 없다고 해서 리트에 올인했다. 그러고 나니 남는 게 하나도 없다. 물론 토익과 학점은 높은데 (토익은 그마저도 곧 만료), 요즘 세상에는 그런 거로 취업은 안 된다고 한다. 하하. 4년만 더 했으면 일본의 '잃어버린 10년'같은 타이틀을 얻었을 텐데.
오늘은 특별한 날이다. 내가 브런치를 개설해서. 농담이고. 법학적성시험 성적 발표일이다. 아침에 성적 발표 페이지를 열어보고 엉엉 소리 내서 울었다. 내 입에서 짐승 같은 소리가 나더라. 그런 건 태어나서 처음 들어봤다. 영화 장면이었다면 최고의 오열 연기로 여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 되었을 텐데, 내 울음은 그저 아랫집에서 층간소음으로 신고할까? 고민하게 만드는 소음에 그쳤다.
그토록 바라던 변호사라는 꿈이 임종하여 화장터로 들어갔다. 맞은 개수는 초시 때보다 많았는데, 이게 웬걸 나만 발전한 게 아니었다. 다 같이 잘 봤나 보다. 표준점수와 등수가 처참해졌다. 예상했던 점수보다 5,6점은 낮게 나와버렸다. 로또 당첨을 비는 마음으로 1차 지원서는 넣을 거다. 그러나 기대는 안 한다.
내 자기소개서가 읽히지 않을 거란 걸 나는 알고 있다.
라라 진이 학창 시절 사랑했던 남학생들에게 애정을 담아 글을 썼던 것처럼, 내가 사랑했던 변호사라는 꿈에 애정을 담아 그동안 미친 듯이 노력한 나의 대학시절에 대한 찬사를 담아 읽히지 않을 자기소개서를 쓰려고 한다. 로스쿨 입학처 서버 어딘가에 저장되었다가 무심히 삭제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내려 한다.
그리고 끝내려고 한다.
20대 절반을 넘도록 좇았던 내 꿈에게 영원한 안녕을 고한다.
1. 새 출발과 여정을 담는 그릇으로
어쩌면 이 꿈에 매몰되어 나의 다른 면은 잊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더 나은 사람인데 이 시험 때문에 바보 천치 꼬리표가 달렸을지도 모른다. 잊고 외면해 온 나의 색채를 되찾기 위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하나씩 되찾고 다시 공부하고 부딪히면서 쌓아가려고 한다. 그리고 그 여정을 브런치에 담아내려 한다.
2. 수다스럽고 복잡스러운 나를 위한 포트폴리오
내가 경험하고 살아온 이야기를 이력서에 다 담기 어렵다고. 줄곧 느껴왔다. 중학생 때 음악학교를 다니고, 고등학교 때는 중국어 통번역사를 꿈꿨으며, 대학에서는 뇌과학을 공부하는 동시에 변호사를 꿈꿨다. 아! 입시 면접 학원 강사로 5년을 일하며 수 많은 고3을 대학에 보낸 의외의 경력도 있다. 참으로 줏대 없는데 성실한 기묘한 인간으로 살아왔다.
그렇지만 나는 내 가치와 매력을 믿는다. 어쩌면 글로 표현하고 브런치에서 계속 외쳐대다 보면 누군가는 알아주겠지. 어떤 채용 담당자는 내가 재밌을 수도 있겠지. 고등학생 때 웃긴 학생으로 줄곧 인기투표 1위를 해왔다. 누군가는 반드시 피식 웃으리라. 그리고 회사에서 같이 일해보고 싶다고 생각하리라.
3. 죽은 꿈에게 바치는 장례식
아침에 엉엉 울고 자기소개서를 쓰려 책상에 앉으니 도무지 기운이 나질 않더라. 어딘가에 하소연하고 오열하고 애도하고 싶었다. 친구한테 말하자니 부담 주는 것 같고... 창피하고. 어딘가에 털어놓는 겸, 종지부를 선언함으로써 이 허망한 감정을 털어내고 앞으로 나아가려고 한다.
잘 부탁합니다! 내 인생아! 그리고 계실지 모르는 독자님!
삶의 새로운 챕터가 시작됐다. 솔직히 뭐가 뭔지는 모르겠다. 뭐가 될지 어떤 결말에 다다를지.
하나 약속한다면,
반드시 재밌을 것이다. 방어기제가 유머인 사람이다.
칠흑같이 어두운 블랙유머가 쏟아지면서도 조금씩은 성장하는 브런치를 만드려고 한다.
다음 글은 아마도 자격증 공부와 취업 준비, 로스쿨 입시 설명회 이야기가 될 것 같다. 재미없는 소재를 재밌게 쓰는 마법을 보여주리다.
2024.8.20. 에어컨을 틀어도 덥기만 한 어느 슬픈 여름날.
p.s. I loved you
to. 로스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