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나 머리가 나빠 ㅠ 미안해"
뇌는 기억을 저장하면서 나쁜 기억은 지우고 좋은 기억은 남긴다고 한다. 지난 학창 시절이, 지난 연애, 지난 젊은 나날들이 유난히 청춘 영화 속 아름다운 장면처럼 보이는 이유는 바로 뇌가 우리 몰래 열심히 미화 작업을 마친 결과이다.
그런데 왜.
내 기억 속의 나는 왜 이리 찌질할까?
그리고 내 나날들은 이리도 궁상맞을까?
재수생 시절, 대망의 두 번째 수능을 보던 날. 점심시간 전 시험들을 마치고 화장실 칸에 들어가 볼 일을 보는데 칸막이 바깥에서 고3 학생들끼리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야, 우리 교실에 재수생 있어!"
그래. 그거 나다. 인마.
수능을 또 봐야 한다는 절망감과 뭔지 모를 반항감에 술을 마시고 머리를 노랗게 물들였더란다. 그래서 재수생인 티가 났나 보다. 졸지에 슈퍼스타가 됐다. 그럼에도 그 아이들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는 건 화장실에 머무는 시간까지도 1분 1초 단위로 나누어 수험 전략을 세운 재수생에게는 사치였다. 그리고 기다려주고 싶지도 않았다. 문을 벌컥 열고 당당하게, '그래 나 재수생이에요.' 하는 표정으로 걸어 나왔다.
그러고 나서 엄마가 싸준 도시락을 챙겨서 교실 밖으로 나왔다. 고등학생 틈 바구니에 끼어있긴 싫었다. 대학생도 고등학생도 아닌,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내가 시선을 받는 게 괴로웠더랬다.
복도에 서서 도시락 뚜껑을 열었을 땐 헛웃음이 나왔다. 엄마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돼지 장조림을 만들어줬는데 돼지기름이 수능 한파를 못 이기고 전부 하얗게 굳어버린 것이다. 도무지 먹을 수 없는 상태였다. 이 추운 겨울, 딸 생각에 열심히 만들었지만 조금은 엉성한 그 노력이 너무 웃기고 고마웠다. 그런데 이게 웬걸, 재수생인 것도 서러운데 밥까지 못 먹게 되니 순식간에 내 처지가 너무 궁상맞아지는 거다. 엄마 얼굴이 갑자기 떠오르는 데다가 화장실에서 뒷담 아닌 뒷담을 들은 것, 아까 풀었던 국어 문제의 답에 확신이 안 드는 처지까지.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생각까지 나를 덮쳐 기어코 눈물샘의 통제력을 잃게 만들었다. 결국 복도에 선 채로 추위에 떨면서 돼지기름을 뒤적이며 고기를 먹었다. 그리고 눈물을 계속 훔쳤다. 그렇게 또 궁상을 떨었더랬다.
어린 날의 궁상맞은 기억이 되살아난 건,
내 생애 세 번째 입시를 하면서였다.
그때보다도 더 궁상맞은 처지로. 찬 바닥에 주저앉아있으니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양재 AT센터에서 열린 법전원 공동입시설명회.
굳이 가야 할까? 생각하다가도, 남들은 다 아는 정보 나만 모르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부리나케 이른 아침부터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너무너무 과열된 입시판은 리트뿐만 아니라 입시 설명회에서도 그 위력을 보여주었다. 시작 시간이 8시면 6시부터 줄을 서서 기다린다고, 시작 시간 전부터 입시 관련 커뮤니티에서 기나 긴 줄 사진이 올라와 있어 마음이 조급해졌다.
도착하니 이미 내가 가려고 마음먹었던 대학원 부스는 번호표 발급을 멈추고 철수 준비 중이었다. 설명회 시작 이후 1시간가량이 흐른 때였음에도 문을 닫아버린 것이다. 조언을 구하는 자리마저도 치열하게 경쟁해야 한다니. 이 지긋지긋한 경쟁에 넌덜머리가 났다. 딱 한 곳. 생각지도 않았던 대학 한 곳만 부스를 열어두었길래 허겁지겁 표를 받고 기다렸다. 당시 진행 중인 번호는 100번대. 내가 받은 표는 500번 대였다.
처음에는 서서 기다리고 있었지만, 춥고 허리도 아파 도무지 계속해서 서있을 수 없었다. 수학여행으로 롯데월드에 다녀오고 너무 지친 나머지 지하철 열차 바닥에 주저앉는 고등학생들처럼, 500번대 번호표를 쥐고 바닥에 털썩 앉아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그런 와중에 만남은 피어나나 보다. 내 앞 두 사람은 청춘남녀다. 희희낙락 서로 "뭐 좋아하세요?" 물어보며 초콜릿을 주고받는다. 두 시간, 세 시간쯤 기다리니 출출해진 찰나 웃음이 쏟아지는 그 예비 커플(?)은 서로 번갈아 화장실도 다녀오더니 같이 먹을 간식거리도 사 왔다. 그걸 지켜보는 내 처지가 좋지 못하니 마음 한 구석이 비뚤어지는 거다. 참나! 짜증 난다, 진짜! 속으로 이죽거렸다. 그런데 서러움에 금세 또 눈물이 고이기 시작하는 거다. 원래부터 울보이긴 했는데, 이렇게나 사람이 많은 곳에서 울기는 창피했다.
천장만 바라보며 울음을 참다가 엄마랑 카톡을 했다. 그리고 기어코 줄줄 눈물을 쏟아내고야 말았다. 모자란 딸이건만 매번 내가 최고라고, 머리가 최고 좋다며. 아닐 걸요? 당신 딸은 그렇게 특출 나게 똑똑하지 않아. 마음속에서 울려 퍼지는 여러 말들.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차마 뱉지 못하겠는 말들. 날 믿어줘서 너무 고맙지만, 난 그걸 충족해내지 못하는 딸이라는 것을. 당신이 최고라고 믿던 그 딸이 사실은 모자란 것 투성이라는 것을. 나는 이 설명회의 그 어떤 대학 부스에서도 환영받지 못할 점수를 받았다는 것을. 가슴이 답답했다.
"들어가면 네가 1등이야. 임신 내내 매일 우유 3천 리터 마셨어. 하루에 세 통씩.
그래서인지 머리가 너무 좋아."
눈물이 계속 쏟아졌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이 궁상맞은 나날들이, 거지 같은 이 처지가 덜 괴로웠다. 그래. 나는 매일매일 엄마가 마신 우유 3천 리터로 만들어진 딸이야. 영특함과 우유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가 성립하는지 알 수는 없다. 아니, 굳이 알고 싶지 않다. 그냥 엄마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그게 정답인 거야.
빨리 가고 조금 늦게 가고의 차이이다. 삶은 기니까. 하고 싶은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많으니 다 괜찮다. 다시금 새겨보는 거다. 나는 3천 리터 우유로 만들어진 딸. 어디든 들어가기만 하면 1등이 되는 그런 딸. 그건 사실이니까. 여태 그래왔으니까 궁상맞은 나날들 속에서도 버티는 거다. 앞으로도 버텨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