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skim Aug 23. 2024

친구의 의리와 스승과 제자의 의리

대화와 소통은 얼굴을 보고해야 오해와 왜곡이 일어나지 않는다.

 

                                       

   요즘은 카카오톡이 일반화되어서 전화로 통화하는 것보다 간편하게 카톡을 많이 사용한다. 그런데 카톡은 얼굴을 보거나 목소리로 대화하는 것이 아닌 글로써 의사를 교환하는 것이어서 간혹 오해가 생기기도 한다. 상대방의 감정을 모르고 대화를 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서신을 통해 의사 교환을 했다. 퇴계(이황)와 고봉(기대승)이 그랬고, 율곡(이이)과 우계(성혼)가 그랬다. 옛사람들의 문집에서 서신이 상당한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봐도 당시의 인적 네트워크의 주요 수단이 편지였음을 알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친구는 사귀기 쉽지 않다. 조선시대나 현재나 친구 중의 최고는 동문과 동학이다. 같은 스승에게서 글을 배운 벗보다 더 가까운 지기가 어디 있을까? 그런데 여기 동문수학한 벗임에도 미움의 대상이 되어 서로 용납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바로 윤선거와 송시열이다.

   윤선거(1610~1669)와 송시열(1607~1689)은 김집(金集)의 문인이다. 두 사람은 처음에는 사이가 좋았다. 그런데 두 가지 사건에서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하나는 1636년 12월에 발생한 병자호란이다. 한 달이 지난 1637년 1월 22일 강화도가 청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당시 강화도에는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그리고 원로대신인 전 우의정 김상용 등이 있었고, 인조 일행은 남한산성으로 피난해 있었다. 강화성이 함락되자 김상용과 생원 김익겸, 별좌 권순장 등은 성의 남문에 올라가 불을 지르고 불 속에 들어가 타 죽었다. 분신 자결을 한 것이다. 당초 윤선거는 강화도가 적에게 함락되면 김익겸, 권순장과 함께 죽기로 결의한 바 있으나, 이때 죽지 않고 종실 진원군의 노복으로 변장하여 남루한 옷차림을 하고 몰래 성을 빠져나와 남한산성으로 갔다. 더욱이 그의 처 이씨는 어린 자식을 두고 자결했다. 훗날 이로 인해 윤선거는 "처와 함께 죽기로 약속했으나 처만 죽었고, 벗과 함께 죽자고 약속했으나 벗만 죽었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를 ‘강도에서 있었던 일’(於江都事)이라 하여 송시열은 윤선거의 행동을 못마땅해하였다. 그때 송시열은 남한산성에 있었다. 이후 윤선거는 자신의 행위를 자책하며 벼슬을 단념하고 은거하였다. 

   1665년 9월 9일 공주 동학사에 윤선거, 송시열, 이유태 세 사람이 모였다.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연보 간행 감정을 위해 모인 것이다. 이 자리에서 송시열은 남인 윤휴를 사문난적이라고 말하며 윤선거에게 그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윤선거는 윤휴가 소인이라며 그와는 절교하겠다고 말했다. 송시열은 윤선거의 말을 믿고 잘했다고 말했는데 윤선거가 나간 후 동석했던 이유태는 윤선거는 마음이 여려서 그리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니 송시열이 긴가민가하는 눈치였다. 1669년 8월 윤선거가 사망하자 윤휴는 자식을 보내 제문을 올렸는데 이를 윤선거의 아들이자 상주인 윤증이 허락하였다. 송시열은 이를 두고 윤선거가 생전에 윤휴와 절교하지 않았다고 의심하게 되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내가 싫어하는 사람을 다른 사람이 가까이하면 그 사람까지 미워하게 된다는 데 송시열이 그랬다.    

   1673년 윤선거의 아들 윤증(1629~1714)은 선친의 연보와 친구인 박세채(1631~1695)가 작성한 행장 그리고 윤선거가 작성해 송시열에게 보내려다 보내지 못한 기유의서(편지)를 첨부해 송시열에게 선친의 묘지명을 의뢰하였다. 아우들은 송시열에게 묘지명을 의뢰하는 것에 반대하였으나, 윤증은 그래도 유일한 아버지의 친구라는 생각에 믿고 의뢰하였다. 더욱이 윤증은 송시열의 제자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친구 사이와 스승과 제자 사이를 더욱 멀어지게 한 계기가 되고 말았다.  

   연보에 윤선거가 윤휴의 재능을 칭찬한 글이 들어 있었고 기유의서에는 송시열에게 윤휴를 받아들이라고 충고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가뜩이나 윤선거가 윤휴와 절교하지 않았을 것으로 의심하고 있었던 송시열에게 이것은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게 하는 증거가 되고 말았다. 송시열은 1674년 2월 박세채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에, 동학사에서 있었던 일을 거론하며 박세채의 행장에 잘못된 사실이 있음을 지적하고, 문제의‘강도에서의 일’(於江都事) 4자를 썼다가 도로 지웠는데 지운 글자를 알아볼 수 있게 하였다. 박세채가 이 사실을 윤증에게 알렸고 이로써 송시열과 윤증의 사이는 더욱 멀어지게 되었다. 그 후에도 윤증은 몇 차례 더 묘지명을 작성해 달라고 부탁하였으나 송시열은 박세채가 쓴 행장을 거의 그대로 옮겨 적을 뿐 자신의 의견을 첨가하지 않고 보내곤 하였는데 이는 윤선거에 대한 미움이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윤증도 이에 단념하고 스승인 송시열이 기질에 병통이 있다고 생각하여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윤선거와 송시열 간 <친구의 의리>, 윤증과 송시열 간 <사제의 의리>는 개인 차원의 의리를 떠나 조선의 당쟁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는 분기점으로 작용하여 조선 후기 역사의 물줄기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 어떻게 보면, 대화와 소통의 문제일 수 있었는데 오해가 오해를 부르고 그것이 쌓임으로써 결국 친구의 의리도 사제 간의 의리도 모두 저버리게 된 것이다. 어찌 오늘날이라고 다를 수 있겠는가? 


작가의 이전글 식영정 마루에 앉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