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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우시카 Sep 18. 2024

능소화 떨어져 누운 그곳에 피어난 꽃

                                  - 마디풀

 









예전에는 그리 흔히 볼 수 있는 꽃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요즘은 여름을 대표하는 꽃 하면 바로 ‘능소화’가 떠오를 정도로 고속도로변을 비롯한 큰 길가, 고즈넉한 시골의 골목길만이 아니라 도시의 삭막한 담장, 심지어는 전봇대에 이르기까지 흔하게 볼 수 있는 꽃이 되었습니다. 초록의 잎과 어울린 화사한 주홍의 꽃색이 아름답고 풍성한 여름 풍경을 만들어 주고 있네요. 한때는 이 꽃을 만진 손으로 눈을 비비면 실명이 된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그건 잘못된 이야기임도 밝혀져서 크게 다행스럽습니다. 사랑했던 임금님에게 버림받고 기다림에 지쳐 죽어 간 궁녀의 애달픈 사연, 꽃에 얽힌 전설도 애잔하여 한층 더 우리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 같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가까운 곳에는 배나무 농장이 있습니다. 그 농장 덕분에 도시에서 일상적으로 들을 수 있는 자동차 소리나 시끄러운 사람들의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습니다. 가로등 불빛마저 없어서 밤이 되면 그야말로 고즈넉한 분위기가 만들어집니다. 이것만 해도 큰 축복인데 여기에 더하여 밤이면 개구리울음소리, 풀벌레 울음소리, 계절 따라 달라지는 새 울음소리, 심지어는 시간에 관계없이 수시로 울어대는 수탉의 소리까지 들을 수 있으니 도시에 살면서도 농촌의 정취를 느낄 수 있어서 늘 즐겁습니다. 


이토록 고마운 그 농장의 문기둥에도 능소화가 자라고 있어 자칫 누추하게 보이는 농장의 입구를 멋지게 꾸며주는 일등 공신이 되고 있답니다. 능소화는 시들어 떨어질 때조차 동백꽃이 그런 것처럼 통째로 ‘툭’ 떨어집니다. 미련이라고는 없습니다. 사랑이 끝났으면 기억이랑 날카로운 칼로 베어버리고 가차 없이 돌아서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사실은 꽃가루받이가 끝났으니 쓸데없이 자원을 낭비하지 않고 꽃을 떨어뜨려 버리는 것이지만요. 이제 그 농장의 문 앞도 어느새 떨어진 능소화의 꽃들로 어지럽습니다. 떨어져 누웠으나 여전히 고운 그 꽃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꽃들 사이로 작은 식물이 보입니다.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보니 좁쌀 같은 꽃이 피어있네요. 바로 '마디풀'의 꽃입니다.  



7월로 접어드는 요즈음 길을 걷다 보면 가로수 주변이든 계단 틈이든 맨홀 뚜껑 가장자리든 화단 가장자리의 돌 틈이든 여기저기서 이 마디풀이 피어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이 마디풀은 별꽃, 냉이, 새포아풀, 흰명아주와 함께 전 세계적으로도 그 분포 영역이 가장 넓은 식물 중 하나입니다. 그만큼 지구 환경에 잘 적응했다는 의미겠지요. 물론 꽃이 하도 작아서 여간해서는 우리들의 눈길을 사로잡지 못합니다. 그러나 눈높이를 맞추어 바라본다면 잎겨드랑이에서 좁쌀처럼 작은 꽃들이 해사하게 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지요. 많은 꽃들이 그렇듯이 활짝 피기 전에는 붉은색이 살짝 돌고, 피어난 후에도 꽃잎 가장자리가 옅은 분홍색을 띠고 있어서 보는 이의 마음을 훈훈하게 만들어줍니다.  



마디풀을 보면 이 녀석이 왜 ‘마디’ 풀인지 바로 이해가 됩니다. 줄기의 모양이 마치 마디와 마디를 이어 붙인 듯 보이기 때문이지요. 학명 중 속명에도 이런 특징이 잘 나타납니다. Polygonum이라는 말은 poly(많다.) + gonum (knee, joint, node)의 합성어입니다. 마디가 많은 식물이라는 아주 단순한 학명을 가지고 있네요. 이렇게 줄기가 마디와 마디로 이어지다 보니 매끈하게 보이지 않고, 마치 평생을 일로 늙어 가셨던 노인들의 손가락 마디 같아 보여 애잔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꽃은 참으로 귀엽고 예쁩니다.

꽃잎처럼 보이는 것은 실은 꽃받침인데 5조각으로 깊게 갈라져 있습니다. 꽃잎은 없으며 (‘국가표준식물목록’의 설명에 따른 것입니다.) 수술은 6-8개이고 암술대는 3개입니다. 어린 시절 꽃을 그릴 때면 습관적으로 그렸던 바로 그 모습입니다. 혹시 저만 그렇게 그렸을까요? 꽃은 작으나 꽤나 매력적인지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등에와 같은 작은 곤충들이 부지런히 드나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큰 세상은 큰 세상대로, 작은 세상은 작은 세상대로 각자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열심히 돌아가고 있습니다.  



마디풀은 가장 대표적인 잡초로 꼽히고 있습니다. 실은 마디풀 자체라기보다는 ‘마디풀과’의 식물을 가리키는 말이긴 합니다만 검색을 해보면 어김없이 ‘마디풀의 효능’과 함께 ‘잡초’라는 항목이 따라 나오네요. 

여기서 잠시 생각해 봅니다. 잡초란 어떤 식물들일까요?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보니 다음과 같이 적혀 있네요. 


가꾸지 않아도 저절로 나서 자라는 여러 가지 풀. 농작물 따위의 다른 식물이 자라는 데 해가 되기도 한다. 


모호합니다. 가꾸지 않아도 저절로 나서 자란다는 것이 잡초의 특징이라면 농작물이나 일부러 심어 가꾸는 작물들을 제외한 모든 식물에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닐까요? 산이나 들에서 피어나는 꽃들, 심지어는 멸종 위기의 식물들도 저절로 나서 자라지 않는가요? 오히려 두 번째의 부수적 특징, 즉 작물 따위의 다른 식물이 자라는 데 해가 되기도 한다는 설명이 우리가 말하는 잡초의 의미와 잘 맞는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잡초는 애초에 인간의 가치 가준(식량, 약초, 심미적 가치 등)을 빼놓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 범주의 식물군입니다.  


하지만 이것도 애매하긴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인간들이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어떤 사람에게는 잡초인 식물이 다른 사람에게는 귀한 야생화나 약초가 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시대에는 중요 작물이었다가 시대 상황이 바뀜에 따라 잡초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잡초에 대한 정의가 이토록 까다롭다 보니 어떤 잡초학자는 이렇게 얘기하기도 합니다. ‘딱 보면 안다.’(원래 이 말은 1964년 ‘음란물’에 대한 법적 판단기준을 언급하는 과정에서 당시 미국 연방대법관이었던 포터 스튜어트가 한 말이라고 합니다. 출처 - ‘미움받는 식물들’, 존 카디어 지음, P17, 윌북) 물론 그도 골치가 너무 아파 농담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결국 거칠게 정의해 본다면 ‘내가 심지도 않았는데 마구 피어나서, 가꾸지 않아도 저절로 자라 번식하는 풀 중에서 농작물이나 원예종 꽃 등 내가 열심히 심어 가꾸는 식물이 자라는데 해가 되는 식물’로 정리될 수 있겠습니다....... ‘나’라는 주어가 핵심입니다. 


문제는 이렇습니다. 농사를 지으시는 분들이나 원예가 선생님들에게 마디풀은 분명 잡초일 것입니다. 그러나 도시의 깨진 시멘트 틈 사이에서 피어나는 마디풀은 잡초일까요, 아닐까요? 그들을 신통하다 여기며 바라보는 ‘나’에게는 잡초일까요, 아닐까요? 아니 ‘지금 여기’에 있는 나에게는 잡초일까요, 아닐까요? 가 맞는 물음일 것입니다. 나 자신도 늘 변하는 존재임을 감안한다면 말입니다.



어떤 이들은 잡초는 없다.’라고 단언합니다정말 그럴까요이름 없는 줄 알았던 꽃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고 그 꽃이 갑자기 잡초가 아니라고 주장한다면농사를 지으면서 긴 시간 잡초 제거에 힘겨워하시는 농부님들이나 원예가들에게는 무척 미안한 일일 것입니다잡초의 제거가 얼마나 어려운 작업인지 어떤 인류학자들은 인간이 정착 생활을 시작한 것은 농업 자체 때문이 아니라 농사일에 뒤따르는 잡초 제거’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까지 말합니다. 더구나 잡초가 이름 모르는 풀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지요. 이름을 알지 못했던 것은 '당신'이고 그들은 예전부터 이름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나도 알고 있습니다. 잡초는 없다는 말이 귀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가르는 바로 그 기준으로 꽃들 또한 귀한 꽃, 귀하지 않은 꽃으로 구분하는 그 날카롭고도 잘못된 칼날에 대한  반감의 표현이라는 것을요.   


그러나 농사나 원예 하고는 거리가 먼 도시의 길바닥에서 피어나는 이 작고 보잘것없는 풀꽃들이 잡초로서의 의미를 더 이상 가지고 있지 않은 것만은 확실해 보입니다. 다만 ‘잡초성’ 만은 그대로 가지고 있겠지요. 더 나아가 이 잡초성이 불모의 도심에서 이 꽃들을 피우는 원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잡초성이란 쉬운 싹트기, 빠른 성장, 제꽃가루받이 능력, 많은 수의 씨앗 맺기, 만들어진 씨앗을 널리 퍼뜨리기 등등의 능력을 말합니다. 무엇보다도 예측 불가능한 환경 변화에 맞춰 그 변화를 극복해 내는데 탁월한 능력을 갖추고 있지요. 긴 농경의 세월 속에서 수시로 갈아엎어지는 경작지, 잡초를 뽑아 없애려는 인간의 쉼 없는 노력, 잘 선택되고 길러지는 농작물과의 경쟁 등 불안정하기 짝이 없는 환경에 적응하면서 생존해 왔을 테니까요. 그래서인지 도심 크랙 정원의 꽃들은 정말 강하고 번식력도 큰 것 같습니다.  



잡초학자들의 설명을 들어본다면 잡초를 없앨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대로 두는 것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개입하지만 않는다면 식물생태계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평형상태를 찾아가고, 그 평형상태의 의미 속에는 ‘적당한 개체 수’도 포함될 테니까요. 없애려 하면 할수록 그에 저항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그 모색의 결과로 새로운 유전자형이 나타나고, 인간들은 그 새롭게 무장한 식물들을 없애기 위한 또 다른 방법을 찾고... 악순환이 계속된다고 합니다. 식물들은 번개처럼 재빠른 바이러스의 변이 능력만큼은 아니겠지만 결국은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돌연변이를 만듦으로써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고, 일단 적응하면 경쟁자가 없는 틈새에서 들불처럼 무섭게 번식해 나가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농촌에서 쫓겨 도시로 들어온 ‘잡초’들은 인간과의 휴전 상태를 즐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들도 이 휴전 상태를 조금 더 느긋하게 즐기면 안 될까요? 특별히 위해 줄 것도 없지만 특별히 미워하며 없애려 하지도 말고 말니다. 시멘트로 뒤덮인 도시의 거리에서 푸릇푸릇 작은 정원을 만들어주고 있는 것만으로 참으로 기특하지 않나요? 



견고한 콘크리트의 세상 속에서도 저토록 끈질기게 버티고 살아남아 끝내 꽃을 피우고 씨앗을 만듭니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공간, 어두운 땅 속에서도 살금살금 자라나서 어느 날 아름답고 당당하게 자신의 존재를 알립니다. 그게 바로 크랙 정원의 꽃입니다.  


‘당신은 저 마디풀처럼 누군가에게 푸르른 존재가 되어 준 적이 있습니까?’

‘당신은 저 마디풀처럼 누군가에게 사랑스러운 꽃이 되어 준 적이 있습니까?’  


연탄재 발로 차지 말라고 한 시인의 말처럼 저 작디작은 생명, 삭막한 내 마음에 작지만 따스한 불씨를 던져주는 저 상냥한 꽃을 굳이 뽑아내려 애쓰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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