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질경이
나는 걷는 것을 좋아합니다. 웬만한 거리에 있는 곳은 가능한 걸어서 가고, 하루 중 한 번은 일부러 산책을 나갑니다. 직장생활과 가정생활을 함께 하느라 바빴던 시절에는 1시간 남짓 걷는 그 시간이야말로 모든 일에서 벗어나 온전히 나 자신에게 몰두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습니다. 걸으면 마음이 차분해집니다. 온갖 상념과 걱정이 엷어집니다. 걸으면 복잡하고 어지러운 감정들로 가득 찼던 마음에 나무와 꽃과 하늘과 길이 들어섭니다. 때로는 비를 맞으며, 어떤 때는 눈을 맞으며 걷기도 했습니다. 그 시절 내게 있어서 ‘걷기’는 신성한 기도의 시간이었다고 기억됩니다. 늦은 퇴근 후 걷는 길에서 4월의 밤이면 맡을 수 있었던 꽃향기, 간혹 키 큰 나무에서 톡톡 떨어지는 이슬방울들, 장마철이면 자동차 헤드라이트에 비치는 빗줄기, 가을밤 올려다본 하늘에 떠 있던 달... 멋진 시간들이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 시간에 나는 땅을 내려다보는 대신 하늘을 자주 올려다보았던 것 같습니다. 현실에서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숱한 소망들과 함께 걷고 또 걷던 시절이었습니다. 요즘은 온갖 ‘길’들이 잘 닦여있어 그 길마다 걷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그래서 걷는 시간의 내밀함은 많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한창 사람들로 붐빌 때는 그런 길들을 피해 나만의 길을 찾아야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지요.
이제 나이 들어 길을 걷다 보니 하늘을 올려다보는 대신 자주자주 땅을 내려다보게 됩니다. 꿈은 어느새 땅으로 내려앉아 소박하기는 하지만 한층 무거운 것이 되었나 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 익숙한 모든 것들이 내 곁에 아주 오래도록 머물러 주기를 바라는 소망......
더운 여름, 밤늦은 시간까지 더위가 식지 않아 걷는 것이 힘들 때면 새벽에 일어나 걸을 때가 있습니다. 그 시간이면 길에는 아무도 없을 것이라는 내 예상과는 달리 그 이른 새벽에도 의외로 많은 할머니들이 길에 나와 계십니다. 산책로를 따라 놓인 벤치에 앉아 멍하게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그녀들의 눈빛을 봅니다. 밤에도 식지 않는 집안의 열기, 잠은 오지 않고 식구들과 부대끼는 것도 부담스럽고... 그래서 길로 나와 계신 것이겠지요. 똑바로 쳐다보기가 왠지 민망합니다. 고개를 숙이고 지나치는 그 길 위에 ‘질경이’가 보입니다. 늘어선 벤치에 줄줄이 앉아 계신 할머니들처럼 질경이도 길의 파인 틈을 따라 줄을 지어 자라나 있습니다. 흙이 묻고 쭈글쭈글한 잎, 보잘것없는 꽃이 핀 질경이가 갑자기 나이 들고 가난한 이 할머니들의 이미지와 겹쳐 보이기 시작합니다. 현대 사회의 최고의 가치인 '아름다움'과 '젊음'이 사라진 내 어머니 세대의 여성들. 평생 한 번도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아 본 적 없으며, 자기만의 재산을 가져 본 적 없고, 평생 한 번도 남에게 존중받아 본 적 없을 것 같은 늙은 여성의 이미지... 필시 어버이날 엄마만큼 여유가 없는 딸이 사 주었을 것 같은 알록달록한 블라우스에 몸빼 바지, 관절이 불거진 쭈글쭈글한 그녀들의 손...
나의 엄마들이 거쳐 왔을 그 길이 보입니다. 그렇다고 그녀들이 늘 불행했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한 때 그녀들은 자식을 낳고 기르며 행복했을 것입니다. 다 주고, 더 주고, 또 주고...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녀들의 삶 자체가 누군가를 ‘살림’이었고, 누군가는 감당해야 할 힘들고 광택 나지 않는 일에 헌신해 온 것이지요. 겉보기에는 질경이처럼 보잘것없었지만, 질경이처럼 살아남아 자식을 낳고 기르고 그 자식들이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생명’, ‘생명의 영속성’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그녀들은 진정한 승리자이지요. 이른 새벽부터 무슨 청승이며 무슨 신파인지 나 자신도 잘 모르겠습니다. 돌아가신 엄마 생각이 났나 봅니다. 사는 모습이야 조금 달랐지만 썩 부유하지도 않은 살림에 유난히 자부심 강한 남편의 그 가부장적 권위까지 어깨에 짊어지고 사셨을 나의 엄마... 고분고분하지도 않은 딸년 때문에 더 힘들었을 엄마가 자주 생각납니다. 생각해 보면 내 엄마도 한 송이 질경이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걸어왔던 그 모든 길에 늘 엄마가 계셨으니까요.
질경이는 아주 오랫동안 우리들과 가까웠기에 얽힌 사연도 꽤나 많은 식물입니다.
길이나 들에서 흔히 자라며 사람이나 차가 다니는 길가에서도 끈질기게 살아남는 질긴 잡초입니다. 이렇듯 사람이 자주 다니는 길가에 많이 나타나기 때문에 어쩌다 길을 잃게 될 경우 질경이를 따라가면 곧 민가가 나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물론 핸드폰과 같은 문명의 이기가 없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어쨌든 질경이는 뭔가에, 누군가에게 밟히는 곳에서 자라나는 식물입니다. 일설에 의하면 생명력이 매우 강해 차바퀴나 사람의 발에 짓밟혀도 다시 살아난다 하여 질긴 목숨이라는 뜻에서 질경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른 설에 의하면 질경이의 본래 이름은 ‘길경이’로 사람이나 동물들이 자주 다니는 길가에서 자라는 식물이라는 의미를 갖는다고도 하네요. 어쨌거나 질경이는 ‘길’과 그리고 ‘걷기’와 질긴 인연을 가진 식물인 것 같습니다. 한자로 질경이를 차전초(車前草)라고 하는데 길을 따라 어디서든 자라는 식물이라는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질경이의 이런 특징은 어느 나라 사람들에게나 아주 인상적이었던 모양입니다. ‘밟혀도 밟혀도 꿋꿋하게 다시 일어선다.’라는 문장은 잡초의 강인함을 표현하는 말이지만, 질경이 경우는 ‘밟혀야 번성한다.’로 바꿔 써주어야 할 것 같네요.
질경이의 이러한 특징은 씨앗에 그 비밀이 있다고 하네요. 즉 질경이의 씨앗에는 젤리상태의 물질이 있는데, 이것이 물에 젖으면 팽창하면서 어딘가에 끈끈하게 달라붙는 성질을 띤다고 합니다. 원래 이 물질의 쓰임새는 씨앗이 마르지 않게 보호하는 것이었을 테지만 결국은 사람이나 동물의 발바닥, 나아가서는 수레나 자동차의 바퀴에 끈적끈적하게 들러붙어 멀리까지 씨앗을 옮기는 역할을 하게 된 것이지요. 사정이 이렇다 보니 질경이는 무엇엔가 밟혀야만 널리 퍼질 수 있어서 역설적으로 밟히기만을 기다리는 꽃이 되어 버렸습니다. 길이란 무엇입니까? 사람이나 동물, 수레가 다니는 통로이니 그들을 따라 질경이도 번창할 수 있었겠지요. 이것이 질경이가 보여주는 첫 번째 지혜입니다.
질경이의 지혜, 2탄입니다.
워낙 흔하게 볼 수 있는 꽃이라서인지 막상 질경이 꽃을 자세히 살펴본 적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이제 한 번 무릎을 굽히고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질경이 꽃을 보면 잎 사이에서 길게 나온 꽃대에 꽃자루가 없는 자잘한 꽃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모양입니다. 이와 같은 꽃차례를 ‘이삭꽃차례’라고 합니다. 이 긴 꽃대의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차례차례 꽃이 피어납니다. 그런 이유로 꽃대 하나에서도 꽤나 오랫동안 꽃을 볼 수 있는 식물이기도 합니다. 오랫동안 꽃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관점에서 이고 그 식물의 관점에서는 꽃가루받이를 오래도록, 충분히 하여 씨앗을 남길 수 있는 기회가 많다는 것이겠지요.
당연한 말이지만 씨앗이 만들어지려면 수정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도 가능하면 딴꽃가루받이를 해야 좋겠지요. 많은 꽃들이 그러하듯 질경이도 암술과 수술이 한 꽃 안에 있는 양성꽃입니다. 자칫하면 제꽃가루받이가 일어날 수 있지요. 가능하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꽃은 나름의 방책을 세워놓고 있습니다.
사진(4번 사진)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삭의 아래쪽부터 꽃이 피어올라가는 모습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수술(4개)들이 채 피어나지 않은 윗부분에 있는 암술(1개)에서는 이미 암술대가 나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암술과 수술이 성숙되는 시기에 차이가 있는 것이죠. 이것이 소위 자웅이숙(雌雄異熟), 즉 암술과 수술의 성숙 시기를 달리하여 제꽃가루받이를 피하는 전략입니다. 자웅이숙에는 암술이 수술보다 먼저 나오는 ‘암술선숙(자예선숙)’과 반대로 수술이 암술보다 먼저 성숙하는 ‘수술선숙(웅예선숙)’이 있는데 질경이는 암술선숙이라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네요. 그 원리는 비교적 쉽게 이해가 됩니다. 즉 암술이 먼저 성숙하는데 그 시기에 같은 높이에 있는 수술들은 아직 꽃가루를 터뜨리지 못하였으니 암술은 자기 꽃의 꽃가루가 아니라 다른 꽃의 꽃가루를 받아 딴꽃가루받이를 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꽃가루받이가 끝난 후 수술이 드디어 꽃밥을 터뜨려 꽃가루를 드러내게 되면 같은 높이에 있는 암술은 이미 꽃가루받이를 끝낸 후이니 수술의 입장에서는 다른 꽃의 암술머리에 꽃가루를 전달할 수밖에는 없는 것이지요. 참으로 단순하면서도 효율적인 전략입니다.
열성 유전자가 나타나는 것을 최대한 막고 튼튼한 후손을 남기려는 식물들의 전략은 이처럼 치밀하게 구상되고, 그 구상은 바로 꽃의 구조로 실현이 되고 있습니다. 인간들보다 식물들이 훨씬 이전에 이미 유전학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거듭된 근친혼의 결과 주걱턱(부정교합)과 단명으로 고통받았던 합스부르크가의 비극이나, 온갖 종류의 유전병으로 고통받다가 어린 나이에 숨진 고대 이집트 투탕카멘 파라오의 비극은 피할 수 있었겠지요? 오늘도 여전히 왕성하게 피어나는 질경이의 승리는 확실히 이처럼 단단한 생식의 지혜에서 비롯된 것인가 봅니다.
질경이를 가리켜 ‘민초’의 강인함을 가졌다고 말하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아마도 ‘밟힌다.’는 이미지와 ‘다시 일어선다.’는 이미지가 결합되어 그런 표현이 사용되는 것 같은데 정확히 말하자면 질경이는 밟힌 후 다시 일어서는 것은 아닙니다. 밟히면 그냥 밟힌 모습으로 살아가되 다만 그 씨앗을 밟는 자의 몸에 붙여 번식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식물학적 ‘사실’에만 근거하여 꽃이 미학적 소재로 사용되는 것은 아니기에, 비록 관용적 표현이라 하더라도 많은 이들이 그런 표현에 공감한다면 그 또한 꽃의 미덕이 되겠지요. '꽃은 옆의 꽃과 경쟁하지 않고 그냥 피어날 뿐이다.'처럼 삶의 현실에서 작은 탈출구를 꿈꾸는 우리의 간절한 바람이 듬뿍 들어간 표현, 그리고 가장 듣기 좋은 말, ‘너는 한 송이 꽃이야!’처럼 말입니다.
꽃은 조금 떨어져서 봐도 충분히 아름답지만, 가까이서 보거나 조금 더 품을 들여 돋보기나 루페를 사용하여 확대해서 볼 경우 또 다른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실 암술과 수술은 말하자면 꽃의 성기(性器)라고 할 수 있지요. 그 소중한 성기를 부끄럼 없이 드러내 놓고 있는 셈이니, 꽃은 이미 자체로 관능적인 존재입니다. 부도덕한 관능이 아니라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고, 우리 인간들에게 먹을거리와 치료약과 옷과 종이와 인테리어 소품과 심지어는 예술까지 선사하는 멋지고도 멋진 관능적 존재입니다. 질경이처럼 소박한 꽃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저처럼 멋진 모습을 가지고 있네요. 특히 수술이 툭툭 터져 나와 자유분방하게 뻗어나가는 모습... 그저 그 꽃 곁을 스쳐 지나가기만 했던 시절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아름다움입니다. 세상은 그 자체로 이미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눈을 뜨고 마음을 열어 그 아름다움을 찾아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다행히 질경이는 가을이 익어가는 이 시간에도 여전히 꽃을 피우며 조용히 그 씨앗을 세상 끝까지 퍼뜨리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멋진 꽃들이 하나 둘 자취를 감추는 시절에도 우리는 여전히 소박한 아름다움 하나를 간직할 수 있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