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기똥풀
오웃, 애기똥풀이라니!
들판에 천지로 피어난 저 어여쁜 꽃의 이름이 애기똥풀이라니요?
처음 꽃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공부랍시고 시작했을 때 나는 이 흔한 꽃의 이름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노란색이 눈부셨던 이 꽃의 이름이 애기똥풀임을 알고 나서는 다시는 잊을 수 없는 이름이 될 것임을 예감했고 그 예감은 틀리지 않았지요. 누구에게 인들 잊힐 수 있을까요? ‘도대체 저 귀여운 꽃의 이름이 왜 하필 똥풀인가요?’라고 물었을 때 꽃 선배님은 줄기를 꺾어 내게 보여 주셨습니다. 진한 노란색 혹은 주홍색빛이 도는 즙이 흘러나왔는데, 그 색이 젖 잘 먹고 건강한 애기의 똥의 색과 같다고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명은 듣고는 다시 한번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꽃이 될 것임을 확신했습니다.
어린 아기들의 죽음이 흔했을 그 가난했던 시절, 기저귀에 묻어난 똥의 색이 이처럼 선명하여 아기의 건강함을 확인할 수 있을 때 그것을 보는 어미와 아비의 마음이 얼마나 뿌듯했을까를 상상하면서 그 이름에 공감, 또 공감할 수 있었지요.
장 보러 가는 길, 늘 애기똥풀 몇 송이가 피어있는 길입니다. 피어났다가 지고, 다시 피어나고... 봄부터 가을까지 끊임없이 피어납니다. 이처럼 애기똥풀은 너무 흔하게 볼 수 있는 꽃이어서 눈에 자주 띄기보다는 오히려 공기처럼 투명하게 느껴져서 눈에 잘 띄지 않는 꽃이기도 합니다. 그날도 무심히 지나치는데 어라, 이번에는 조금 더 다른 느낌이 드네요. 오던 길을 몇 발자국 뒷걸음질 쳐 돌아가서 들여다봅니다. 세상에나 애기똥풀이 ‘꽃마리’와 어울려 피어있네요. 그래서 스쳐가는 내 눈길 속에서도 여느 때와는 다른 느낌이 들었나 봅니다.
본격적인 가을로 접어드는 이때 꽃마리와 애기똥풀의 콜라보, 갑자기 행복해집니다. 사실 애기똥풀은 크랙 정원의 대표적인 꽃이기도 해서 내년 봄에나 갓 피어나는 싱싱한 모습과 함께 한 편의 글이 만들어진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봄이 갑자기 내 눈앞에 나타난 셈이지요. 가을 속에 소복이 피어난 봄!! 멋진 자연의 선물입니다. 그 선물을 어찌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기쁜 마음으로 공손히 받아 듭니다.
주인공 애기똥풀의 사진을 몇 장 찍고 이번에는 찬조 출연한 꽃마리의 사진도 찍어봅니다. 영락없는 봄의 크랙 정원입니다.
그러고 보니 요즘 남녘에는 철없는 벚꽃이나 철쭉이 피어났다는 기사를 심심치 않게 볼 수가 있습니다. 신기하기는 하나 사실 이런 현상은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특히 추석 무렵 벌초를 하고 나서는 꽤 흔하게 볼 수 있지요. 또 같은 장소에서 매해 이처럼 철없이 피어난 꽃을 볼 수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꽃이 피어나는 기작(메커니즘)에 대해 별로 아는 바가 없기에 나는 그저 신기해하며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현상을 두고 나와는 달리 심각한 걱정을 하는 분들도 꽤 많은 것 같습니다. 가을에 봄꽃이 피어나는 이유가 ‘기후변화’ 탓이라고들 하네요. 나는 잘 알지 못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걱정이 사실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만약 제주도의 벚꽃이 이 가을에 피어난 이유가 올해 유난히 심했던 폭염과 호우로 인한 벚나무의 성장호르몬 이상이 원인이었다면, 그 현상이 단순한 '불순한 일기' 탓이라고 해야 할는지 아니면 기후변화 때문이라고 해야 할는지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 내년에도 그다음 해에도 또 그다음 해에도 이런 현상이 계속되어 벚나무의 개화 시기가 봄과 가을, 두 계절이 된다면 그때서야 비로소 기후변화 때문은 아닐까 의심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봅니다.
‘기후변화’... 바야흐로 6번째 대멸종이 눈앞으로 다가왔다고들 합니다. 상상이 되지 않기에 그런 큰 문제 앞에서는 그저 막막해질 따름입니다. 더욱 분명해지는 기후변화의 명백한 증거들, 이상 기후로 인한 재해들에 대한 보도를 접하며 보며 과연 이 행성에서 호모 사피엔스의 존속이 어느 정도까지 가능할까를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나의 걱정이 진지한 것인가에 대해 남몰래 부끄러워하기도 합니다. 이미 익숙해진 이토록 안락한 삶의 방식을 바꾸거나 포기하기에는 이미 늦어버렸잖아, 또는 내가 아니라도 누군가가 걱정하면서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해 주겠지?라는 뻔뻔한 무임승차자의 의식... 내 관심은 거칠게 표현하면 ‘가짜 관심’이며 ‘사이비 걱정’이고, 겉보기에 고급스러워 보이는 ‘첨언’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기후변화에 대한 조각난 지식의 단편들은 이미 충분히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접하는 현상에 대해 이 용어를 사용하는 데 대해서는 주춤거리게 됩니다.
기후변화에 대해 두 가지 생각을 해 봅니다.
그 하나는 ‘과연 기후변화란 정확히 어떤 현상인가?’하는 문제입니다. 단편적인 현상들에 대해 쏟아지는 정보 때문인지 오히려 그 정확한 ‘의미’를 파악해 내기가 어렵습니다. 비가 여느 해보다 많이 내려도 기후변화, 여름이 유난히 길고 기온이 높아도 기후변화, 단풍이 들지 않고 잎사귀가 말라버려도 기후변화, 병충해로 농사를 망쳐도 기후변화, 유난히 혹독한 추위로 힘겨운 겨울이 길어져도 기후변화, 봄꽃이 가을에 피어나도 기후변화... 도무지 갈피를 잡기 어렵습니다. 기후란 원래 수시로 변하는 것입니다. 기후변화가 말 그대로 '기후가 변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용어가 아닐진대 이런 식의 남발은 오히려 그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게 하기도 합니다.
두 번째 문제입니다. 내가 기후변화를 들먹이며 지구를 걱정하는 ‘척’을 할 때면 나 스스로도 마치 기후변화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취급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후변화 현상에 대한 계몽의 시대는 진작에 막을 내렸습니다. 이제는 ‘기후변화를 가져온 자는 누구인가’, 그리고 그것이 그토록 중요한 문제라면 ‘그 문제를 해결할 자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이 필요할 때가 아닐까요? 그리고 그 질문에는 당연히 주어가 있어야겠지요. 늘 주어가 빠진 문장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빠진 문장은 마치 내게 면죄부와도 같은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스스로에게 주는 이상한 면죄부이지요. ‘나는 아니야, 내 책임 아니야!’ 일부 정치가들의 ‘주어’ 또는 ‘주체’가 빠진 신박한 문체를 접하면서 한편으로는 비웃고 한편으로는 분노하기도 했는데 내가 기후변화를 말할 때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됩니다.
말의 무거움에 대해 생각합니다.
너무 자주 가볍게 얘기함으로써 그 말이 가지는 무거움이 자칫 가려질까 두렵습니다. 왜냐하면 기후변화는 너무도 엄중하고 무겁고 두려운 사안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세대의 인류에게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후손들의 삶, 나아가 인류 전체의 존속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음을 알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말을 남발하며 이내 익숙해지고, 익숙해지다 보면 원래 그 말이 가지는 무게는 눈 녹듯 사라져 버리는 현상을 여러 번 경험합니다.
결코 기후변화를 걱정하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좀 더 무겁게 받아들이고 좀 다 신중하고 진지하게 다뤘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다른 누구에게 보다도 나 자신을 다잡는 생각이기도 합니다.
2019년 10월 말에 서울 인근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위쪽은 ‘할미꽃’, 아래는 ‘조개나물’입니다. 둘 다 봄 피는 것이 자연스러운 꽃들인데 가을의 한가운데서 피어났네요. 벌초 후 새롭게 자라난 꽃대에서 피어난 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후변화 때문은 아니었을 것 같아 그저 신기하고 어여쁜 가을의 선물로 생각하며 즐겁게 받아들였던 것 같습니다.
계절에 맞지 않게 꽃을 피우는 현상을 ‘불시개화’라고 한답니다. (따지고 보면 이 용어는 정말 우습습니다. 멋지게 보이는 낱말이기는 하나 아무런 새로운 정보도 주고 있지 못하니까요. 단순한 동어번복이지요?) 어쨌거나 이런 용어가 필요했다는 것은 그런 현상이 예전부터 관찰되었다는 하나의 증거가 될 수도 있겠네요. 농담으로 하는 말처럼 ‘철없는 꽃’들이 피어나는 현상이지요. 사람들의 사회에서도 철없는 인간들은 일면 골칫거리가 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빡빡한 사회 조직에 ‘틈’을 만들어 우리를 미소 짓게 만들기도 하지요. 철없는 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기후변화 때문이 아닐까 걱정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바라보는 나를 행복하게 해주기도 합니다.
다시 애기똥풀로 돌아가 봅니다.
약간 뒤로 젖혀진 꽃잎 때문에 멋진 꽃술이 도드라져 보입니다. 가운데 유난히 볼록 솟은 암술 하나, 그 주위에 많은 수술들이 보이네요. 마지막 사진에서는 열매를 달고 있는 모습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치 작은 콩깍지처럼 귀여운 모습이네요.
그 고운 색에도 불구하고 애기똥풀을 보면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습니다. 그 즙의 그 노란색이 꽤나 강렬한 데다가 줄기와 잎에는 제법 긴 털이 나있기 때문이지요. 특히 꽃봉오리의 털은 약간 으스스한 느낌이 들 정도로 거칠어 보입니다. (4번 사진)
게다가 애기똥풀은 양귀비과에 속하는 식물인데 양귀비과의 식물들은 대체로 독성이 있습니다. 독성이 있기 때문에 함부로 만지는 것도 그리 좋은 생각은 아니지요. 물론 그 독성이 피부를 손상시킬 정도는 아니지만요. 단, 애기똥풀 즙이 살에 묻으면 잘 지워지지는 않습니다. 이런 특징 때문에 예로부터 천연염료로 사용되기도 했다고 하네요.
다른 글(‘큰개미자리’)에서 잠시 엘라이오솜과 식물들의 번식 전략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는데 이 애기똥풀 역시 자신의 씨앗을 널리 퍼뜨리는데 개미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씨앗에 엘라이오솜을 붙여 개미를 유혹하는 것이지요. 재미있는 통계가 있어서 인용해 봅니다.
엘라이오솜을 이용하는 각종 식물의 씨앗에서 엘라이오솜을 떼어내어 그 무게를 재봤더니 가장 가벼운 것이 애기똥풀이었다고 하네요. 얼레지의 씨앗에 붙은 엘라이오솜이 가장 무거웠고요. 그런데 엘라이오솜 중량비(엘라이오솜만의 무게/씨앗 전체의 무게)로 계산해 보면 애기똥풀이 가장 높았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씨앗 자체의 무게에 비해 엘라이오솜의 양이 많다는 얘기이니 개미들로서는 애기똥풀 씨앗의 가성비가 가장 좋다는 것이지요. 애기똥풀이 군락을 이루며 무성하게 번식하는 비밀을 알 것 같습니다. 에효~~ 똘똘한 녀석 같으니!! (http://www.indica.or.kr/xe/flower_story/6706759에서 재인용)
어제오늘 아침 기온이 10도 아래로 떨어졌으니 본격적인 가을이 시작된 것 같습니다. 허름한 슬레이트 담장 아래 크랙 정원에서 피어난 애기똥풀과, 무엇이 좋다고 철없이 따라서 피어난 꽃마리가 사랑스럽습니다. 나만을 위한 깜짝 이벤트라 생각하며 바라보려니 늙은 할망구 주책입니다, 갑자기 봄의 소녀처럼 까르르 웃고 싶어 지니 말입니다. 행여 웃음소리가 비어져 나올까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며 그래도 한번 크게 미소 지어 봅니다. 이제 곧 가을이 깊어지면 가을만의 우울이 찾아들 수도 있겠지만, 아직은 이 두 상냥한 봄꽃들로 싱그럽기만 한 가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