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털쇠무릎
내가 걷는 모습을 보며 어떤 이들이 슬며시 묻습니다. “저, 혹시 무슨 운동하세요?”
심지어 직장에 다닐 때 빠른 발걸음으로 걷는 나를 보고 놀라며 “무슨 일 있어요?”라고 걱정스럽게 묻는 이들도 많았습니다. 무슨 일은 무슨 일, 그냥 늘 하는 일을 하러 평범하게 걷는 것뿐인데...
사는 게 바빠서였을 수도 있었지만 타고난 성격에다가 남보다 강한 무릎의 힘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많은 직장 여성들이 경험하는 일이지만, 직장생활을 하던 시절 하루 일과를 끝내고 지치고 지친 몸으로 퇴근하면 또 다른 성격의 일들이 산더미처럼 밀려오는 나날이 반복되고는 했습니다. 신기한 것은 도저히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은 몸은 그래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물리적 세계에서와는 별도로 인간에게만 따로 적용되는 ‘몸의 관성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더 놀라운 것은 그 바쁘고 힘든 시간을 지내고 다시 거리로 나서 1시간씩 걸었다는 사실이지요. 함께 등산을 하러 나섰던 동료 한 사람은 내 빠른 걸음에 감탄(?)하며 나를 ‘스트리트 퀸’이라 부르며 놀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작년부터 사정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몸이 무거워지고, 무릎은 뻣뻣해지고, 잠을 자고 나도 개운하지 않고 허리와 다리에 통증이 있습니다. 가볍게 몸을 일으키기가 쉽지 않았고, 앉을 때에도 조심하지 않으면 아팠습니다. 쪼그리고 앉아 빨래를 하는 일은 아득한 옛일로 기억되는 것 같았지요. 우울하고 암담했습니다. 내가 스스로의 몸을 마음대로 움직여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보고 싶은 꽃을 보고, 가고 싶은 곳을 다닐 수 있는 시간이 내게 얼마나 남았을까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삶의 방식을 바꿔야 하는 전환점이 온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매일매일 늙어가는 나의 몸과 아직도 지나간 젊은 시절에 사로잡혀 있는 나의 마음... 이 둘을 사이좋게 화해시키고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여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조정하는 일이 주요한 과제가 된 것이지요.
다행히 걱정하는 만큼 건강이 나빠진 것은 아니었고 일시적인 스트레스로 기(氣)의 순환에 문제가 생긴 것으로 진단을 받았고 몇 달간의 치료 덕분에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큰 문제없이 살아갈 수 있게 되었으니 한 시름 놓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더 이상 젊어질 일 없고, 몸도 더 이상 날렵해질 일이 없으니 몸과 마음의 화해 작업은 계속되어야겠지요. 쉽지는 않습니다만 노력은 하고 있습니다.
‘털쇠무릎’이 이곳저곳에서 눈에 띄기 시작합니다.
꽃이라 부르기도 민망합니다. 마치 산적들의 손에 들려있을 법한 우락부락한 쇠망치를 닮은 모양입니다. 키는 또 어찌나 큰 지 이 식물을 크랙 정원의 꽃으로 소개하는 것이 맞을까를 고민해 봅니다. 숲 가장자리에 많이 피어나기는 하지만 밀려 나온 쇠무릎이 간혹 크랙 정원에 그 모습을 드러내니 넓게 보면 크랙 정원의 식구라고 해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닐 것 같습니다.
쇠무릎(털쇠무릎과 쇠무릎은 다른 종의 식물이지만 유사종이므로 편의상 쇠무릎이라고 적었습니다.)은 말 그대로 우슬(牛膝), 그 마디가 소의 무릎을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글쎄요, 나라면 그저 무심하게 지나쳤을 것 같은 모양인데 옛사람들의 눈에는 특히 이 굵고 억세 보이는 마디가 가장 인상적이었나 봅니다. 튼튼하게 생긴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소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었고, 자연에 대한 관찰력도 뛰어났을 옛사람들은 식물에게도 요즘의 우리들이라면 생각하지도 못했을 재미있고도 그 생김새에 딱 맞는 이름을 붙여주곤 했던 것 같습니다. 특히 동물의 이름을 가진 식물들이 많은 것을 보며 그들의 생활 터전과 나의 그것이 얼마나 다른 것인가를 새삼 느끼곤 합니다.
도시, 인류의 새롭고 강력한 서식지... 그러나 강력한 겉모습과는 달리 매우 취약한 서식지이기도 하지요. 자급자족의 능력이 없기에 주위에 반드시 수많은 식민지를 거느려야만 생존 가능한 약탈적 서식지, 그 식민지들이 사라지거나 문제가 생기면 잠시도 버틸 수 없는 허약함... 그곳에 나는 살고 있습니다. 수많은 인간들로 북적대기는 하지만 다른 종의 생명들이 없이 외롭고 삭막한 서식지이기도 하지요. 그러기에 나는 새로운 꽃을 보면서 그 꽃에게 고슴도치풀, 낙지다리, 나비나물, 까치발, 병아리다리, 다람쥐꼬리, 참배암차즈기 같은 이름을 붙여줄 생각은 꿈에도 할 수 없습니다.
꽃의 이름들이 참 재미있지요? 그 모양이 궁금하시다면 인터넷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으니 재미 삼아 둘러보시면 좋겠네요.
쇠무릎의 모습을 보고 그 '꽃'의 정확한 생김새를 추측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전체적인 모양이 너무나 강렬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 쇠몽둥이가 사실은 꽃의 덩어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꽃대에서 벼이삭 모양의 녹색 꽃이 피는데 어머나 깜짝이야, 어찌 이리 사랑스러운지요. 3, 4번 사진을 보면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정말로 깜짝 반전이라고 할까요? 까칠한 녀석, 요렇게 사랑스러운 꽃을 숨기고 있었네! 요즘 말로 ‘츤데레’라고 하나요? 딱 그렇습니다.
조금 더 접사 하여 살펴보도록 합니다.
한 개의 암술대에 하나의 암술이 솟아있습니다. 그 주위에 또렷하게 솟아오른 5개의 수술도 보입니다. 이 암술과 수술을 보호하고 있는 초록색의 것, 끝부분이 뾰족하여 날카롭게 보이는 5개의 조직이 꽃덮개입니다. 꽃부리와 꽃받침의 구별이 없는 경우 이 용어를 사용하는데 우리들의 눈에는 꽃받침처럼 보이니 그렇게 생각해도 꽃을 이해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을 것 같네요. 여기까지는 다른 꽃들과 큰 차이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닫힌 꽃덮개 위로 가는 바늘 같은 것이 보입니다. 바로 ‘포엽’입니다. 각각 3개씩 달리는데 그중 2개는 길고 하나는 짧아 2개만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포엽이란 잎이 변한 것으로 싹이나 꽃봉오리를 싸서 보호하는 작은 잎입니다.
꽃을 바라보는 것은 좋기만 한데 꽃의 구조를 가지고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은 참으로 재미없지요? 잠시만 참아주세요.
이 포엽 아랫부분을 잘 살펴봐 주세요. 그곳에 흰 비늘조각 같은 뭔가가 붙어 있네요. 마디를 접사 하여 본 사진 중 아래쪽 것, 특히 동그라미 친 부분을 확대하여 보면 보일 것 같네요.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이 비늘조각의 개수에 따라 ‘쇠무릎’과 ‘오늘의 주인공인 ‘털쇠무릎’이 구분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면 털쇠무릎, 두 개면 쇠무릎이지요.
어떤 이들은 털쇠무릎에는 털이 많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정확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재미없는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늘어놓은 까닭은 두 가지입니다.
그 하나는 우리가 흔히 쇠무릎이라고 불렀던 식물은 실은 털쇠무릎이고 쇠무릎은 상대적으로 보기 어려운 식물이라는 점, 두 번째는 식물의 종을 구분하는 일이 때로는 이처럼 섬세한 작업이라는 점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털쇠무릎의 꽃은 ‘이삭꽃차례’로 피며, 그 이삭의 아래쪽부터 피어올라갑니다. 그래서 사진을 보면 아래쪽에는 이미 열매가 보이네요. 열매는 긴 타원형으로 포엽과 꽃받침에 싸여 있고 그 속에는 씨앗이 1개 들어 있습니다. 이 열매들은 까칠까칠하여 마치 도깨비바늘처럼 사람의 옷이나 동물의 털에 달라붙어 먼 곳까지 퍼져나가 번식한답니다. 똘똘한 녀석들이지요? 그래서 털쇠무릎의 기세가 그처럼 맹렬한지도 모르겠습니다.
많은 식물들이 그랬던 것처럼 쇠무릎 역시도 예로부터 각종 질병의 치료에 많이 쓰였다고 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으나 인터넷의 자료에는 쇠무릎에 사포닌, 엑디스테론, 이노코스테론, 시스토스테롤, 칼륨염 등의 성분이 들어있어 세포막 염증을 억제하므로 관절통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고 하네요.
하지만 여기서 나는 발칙한 상상을 해봅니다. 관절통의 치료와 쇠무릎의 효능에 관해서는 말하자면 일종의‘유추(類推)’작용이 일어난 것이 아닐까 하는... 두 사물 간의 어떤 속성이나 관계가 비슷하다는 점을 바탕으로, 한 사물의 특성이나 관계를 다른 사물에 적용하는 사고가 바로 ‘유추’지요. 사실 그리 합리적이지 못한 것인데도 우리들이 무의식적으로 하는 사고의 형태이기도 합니다. 쇠무릎과 관절염의 치료 간에는 혹시 다음과 같은 유추가 동원된 것은 아닐는지요? 쇠무릎의 생김새만큼이나 까칠한 나, 상상의 회로를 돌려봅니다.
전제 1: 쇠무릎의 마디와 인간의 무릎은 그 모양이 비슷하네!
전제 2: 쇠무릎의 마디는 튼튼하게도 생겼어!.
결론 : 그렇다면 쇠무릎을 먹으면 사람들의 무릎 관절도 쇠무릎의 마디처럼 튼튼해질 거야!
너무 지나친 상상이지요? 쇠무릎의 약효에 대해 연구하시는 분들께는 정말 죄송합니다. 믿지 않아서가 아니라 약 성분이나 약효에 대한 설명이 내게는 너무 어려워서 딴지를 걸어 본 것입니다.
어쨌거나 무릎이 아파서 깊은 고민에 빠졌던 나는 그것이 과학적인 것이 아닐지라도, 유추에 불과한 것일지라도 믿고 싶습니다. 무슨 무슨 약효 성분이 있다는 그 말들보다 더 직관적으로 다가오는 쇠무릎의 튼실한 마디, 내 무릎도 저처럼 튼튼해질 수 있다면 온 동네의 쇠무릎을 가져다 차로 만들어 마시는 일도 마다 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우리들의 조상님들이 그러했듯이 말입니다.
참으로 보잘것없다고 생각했던 털쇠무릎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참으로 놀라운 점이 많습니다. 거친 외모에 비해 너무 어여쁜 꽃, 씨앗을 퍼뜨리는 방식, 약으로서의 쓰임새...
그나저나 앞으로는 살살 걸어 다니는 연습을 하려고 합니다.
잘 걷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얼마나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지를 뼈저리게 알게 해 준 내 무릎의 반란... 그 반란이 어느 정도 진압되었으니 앞으로는 아끼고 살펴서 오래도록 내 크랙 정원을 돌보고 싶습니다.
긴 글 읽으시느라 고생하셨는데 자, 잠시 차 한잔 하실까요?
‘우슬차‘ 어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