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쇠별꽃
어젯밤 조용히 시작되었던 두통은 밤새 그 존재감을 또렷하게 키워갔고 새벽녘에는 견디기 힘들 정도가 되었습니다. ‘나라는 존재를 가장 또렷하게 느낄 수 있는, 내 실재를 확인할 수 있는 가장 분명한 것은 뭘까?’라는 내 질문에 대해 친구가 답한 말을 생각합니다. ‘고통, 참을 수 없는 몸의 고통’이 그것이라고요. 친구는 암투병 중에 있습니다. 정말이지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아침입니다. 지난 며칠간 아무 일도, 심지어는 나쁜 일이라곤 없건만 마음이 어지러웠습니다. 막연한 불안, 걱정거리는 없는지 애써(?) 찾고, 몸은 움츠러듭니다. 이렇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게 믿어지지 않습니다. 내가 이토록 평온한 시간을 누려도 되는 것일까? 병이지요, 네, 그렇습니다. 병이 맞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평생 이런 근거도, 의미도 없는 걱정을 하고 살아왔는데 이제 와서 느긋한 마음의 여유를 가져보라고 스스로에게 강요하는 것은 너무 염치없는 짓 같기도 합니다. 나라는 인간은 결코 한 번도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존재였던 적이 없습니다.
이럴 때 나는 ‘우주와 별과, 알 수도 없고 이해가 되지도 않는 양자역학의 세계’ 속으로 살짝 발을 들여놓곤 합니다. 내가 이미 그 우주 안에 살고 있음을 생각한다면 이 표현 자체가 성립할 수 없는 말이지만, 뭐 어떻습니까? 어차피 그 세계는 내게는 이해 불가한 세상인데요. 그곳은 깜깜하고 아주 차갑고 무한히 넓습니다. 그 무한의 공간 안에 어쩌다가 하나씩 별이 떠 있습니다. 내가 이곳 지구에서 밤하늘을 쳐다보며 감탄하는 그 '별의 바다'와는 아주 딴 판인 세상이 존재합니다. 별은 갠지스 강변의 모래알만큼이나 많지만 그 어두운 공간, 우주의 크기에 비하면 별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기적처럼 드문 일이기에 내 눈으로 그 별들을 볼 수 있다는 것은 그 기적에 다른 하나의 기적을 더하는 또 다른 차원의 기적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세상에는 무한한 시간이 흐르고 있습니다. 무한한 공간과 무한한 시간, 상상조차 버거워 나는 단지 작은 소리로 속삭여 봅니다. 무한, 무한, 무한... 유한한 존재가 무한을 상상할 수 있는 방법을 나는 모릅니다.
그곳은 이상한 곳입니다. 내 감각이 의미가 없게 되는 세상. 그곳은 진공이라면서도 끊임없이 다양한 입자들이 찰나의 순간마다 생성되었다가는 사라지고, 그 과정에서 생겨난 에너지가 들끊는 곳이라고 합니다. 진공이라면서, 아무것도 없다면서 무(無)도 아닌 어떤 상태... 또 고양이가 살아있기도 하고 죽어 있기도 한 곳이라고도 합니다.
왜 이렇게 이해 불가한 이야기에 매료되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편안해지고, 상상은 자꾸 자라나 넓고 크게 벋어갑니다. 이런 스케일의 세계를 상상하고 있노라면 내 걱정거리는 너무도 사소해서 거의 존재하지도 않는 그 무엇이 되는 느낌입니다.
내게는 이와는 매우 다른 또 하나의 위안이 있습니다. 짐작하시겠지만 ‘꽃’입니다. 꽃을 보는 순간입니다. 내 생각은 실로 대책 없는 난장판입니다. 차갑고 공허한 우주와 따뜻하고 작고 생생하게 살아있는, 아름다움으로 충만한 꽃!
이토록 다른 두 개의 세상, 별과 꽃 두 개의 서로 다른 위안이 만나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별꽃’입니다.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생김새보다 그 이름이 더욱 아름다운 꽃... 꽃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내 진짜 속마음은 그렇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오늘의 주인공은 별꽃이 아니라 ‘쇠별꽃’입니다. 별꽃과 ‘쇠별꽃’은 각기 다른 종의 꽃입니다. 생김새와 아주 비슷하여 착각하기도 하고 그 차이를 별로 의식하지 못하고 지나치는 경우도 많습니다. 별꽃이 아니라서 조금 어색하기는 하지만 내 크랙 정원에서 눈에 띄는 꽃은 쇠별꽃뿐이네요.
참고가 될까 하여 두 꽃의 차이를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가장 뚜렷하게 구별되는 포인트는 바로 암술대입니다. 암술대가 세 갈래로 갈라져 있으면 별꽃이고, 다섯 갈래로 갈라져 있으면 쇠별꽃입니다.
<쇠별꽃>
위쪽의 사진은 별꽃입니다. 암술대가 세 갈래로 갈라진 모양을 확인하실 수 있지요?
그런데 이 사진에서 암술대만 크게 확대하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쇠별꽃에 비해 잎사귀가 좀 더 둥근 모양이지요? 이 점도 별꽃과 쇠별꽃을 구분하는 차이점입니다. TMI네요.
아래의 사진이 바로 오늘의 주인공 쇠별꽃입니다. 5갈래의 암술대가 보이시나요?
어때요? 꽃이 별처럼 보이시나요?
제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꽃 자체보다는 그 이름이 아름답다고 말한 것입니다.
내 마음속의 별은 5 각형입니다. 어릴 때 별 그림을 그릴 때면 의례히 그랬듯이 별은 노란색이고, 그 모양은 오각형입니다. (위쪽) 그러나 별의 모습은 조금씩 진화하기도 합니다. 조금 더 자라서 겉멋이 들 무렵이면 별의 모양은 이렇게 변하기도 합니다. (아래쪽)
이제 나는 별의 참모습이 어릴 적 내 그림 속의 그것과 같지 않음을 압니다.
별은 그저 상상할 수 없이 뜨겁게 불타는 커다란 공덩어리일 뿐입니다. 어떠한 낭만도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태양의 모습)
그러나 상상해 봅니다. 아득한 옛날 하늘을 올려다보면 반짝이는 별들이 밤하늘에 가득했을 것입니다. 올려다보는 하늘을 가득 메운 별들, 너무 가까이가 아니라 멀리서 바라보았을 때에야 이제 우주는 낯설지 않은 그 무엇인가가 됩니다. 내 마음속 별의 세상입니다.
<제임스 웹 망원경으로 찍은 우주의 모습>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 같은 별들, 우리의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에서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는 별들, 지상의 고단한 삶에서 멀리 떨어진 신비한 존재. 반짝... 반짝... 반짝... 사실 별은 늘 일정한 빛을 내고 있기에 결코 반짝이는 존재도 아닙니다. 별이 반짝이는 이유는 내가 '그것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별빛이 대기로 들어오면서 겪는 굴절과 간섭, 회절의 복합 효과가 별들의 반짝임을 만들어 내는 것일 뿐 우리가 반짝인다고 생각하는 것은 실은 빠르게 바뀌는 별들의 밝기와 위치의 변동일 뿐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변동은 ‘나’의 눈을 통해 들어오기에 결국 별들의 반짝임은 다른 누가 아니라 나만의 반짝임이기도 합니다. 같은 것을 보고 있다 해도 우리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별들의 반짝임을 바라보고 있는 셈입니다. 그리하여 누구나 자기만의 반짝임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저 별들’은 ‘나의 별들’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인들 그렇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자기들 나름대로의 우주 안에서 자기들 나름의 세상을 보며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꽃을 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꽃은 나만의 꽃입니다.
별을 닮은 꽃은 많습니다. 그러나 쇠별꽃 한 송이를 들여다보면 신기하고 예쁘기는 해도 그 안에 별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만약 쇠별꽃이 별을 닮았다면 한 송이 한 송이씩 있을 때가 아니라 땅바닥을 뒤덮으며 피어났을 때입니다. 마치 하나하나의 별이 아니라 전체로서의 우주를 보았을 때에야 별의 신비가 드러나는 것처럼 쇠별꽃도 무더기 져 피어났을 때 그 아름다움이 온전하게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자잘하게 피어난 작은 꽃이 땅을 덮고, 저 뒤의 꽃들이 햇살을 받아 몽글몽글한 배경을 만들어 줄 때면 마치 하늘에 떠있던 별들이 땅으로 내려온 듯합니다. 이제야 비로소 쇠별꽃은 ‘별’이 됩니다.
우주 안의 별들이 땅으로 우수수 떨어져 흙에 묻혔다가 이유 없는 불안으로 괴로워하는 나를 위해 한꺼번에 피어나 나의 별꽃이 된 것입니다.
깊어가는 가을밤 유난히 청정한 하늘, 그 하늘에 총총히 박힌 별들을 보며 떠올려 보는 상상입니다!
Stellaria aquatica, 쇠별꽃의 학명 앞부분입니다.
Stellaria, 별을 닮은 꽃 / aquatica, 물가에 피어나는 꽃.
별꽃은 주로 들에서 자라는 데 비해 쇠별꽃은 물가에서도 많이 피어나는 모습을 보고 이런 이름을 붙인 것 같습니다.
쇠별꽃의 꽃잎은 얼핏 10장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한 장의 꽃잎이 깊게 갈라져서 마치 2장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5장보다는 10장의 꽃잎이 더 화려해 보여서 가루받이 곤충을 불러들일 기회가 많은 까닭이겠지요.
신비한 모양으로 갈라진 암술대와 많은 수의 수술, 북실북실한 털까지 사랑스럽습니다. 더구나 보통은 봄에서 여름까지 피는 꽃인데 내 크랙 정원에 이렇게 늦게서야 피어나 나를 기쁘게 해 줍니다.
내가 지금 바라보는 저 별빛은 지금 현재 별의 모습은 아니라고 하네요. 수십만 년, 수백만 년, 혹은 수억 년의 세월을 지나 이제 비로소 내 눈에 도달한 그 별빛... 나는 그처럼 상상하기 힘든 먼 과거의 빛을 지금 바라봅니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 별은 어쩌면 지금쯤 이 우주에서 소멸해 버린 별일 수도 있겠지요. 우주적 차원에서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조차 큰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럴진대 우주의 변두리, 저 존재조차 희미한 행성 위의 한 생명체가 무엇을 그리 고민하며 힘들어해야 할까요? 잠시 무거운 마음을 내려놓고 심호흡을 해봅니다. 다 지나가는 것이다. 다 지나가는 것이다. 다 찰나의 것들이다.
크랙 정원에서 늦게서야 피어난 쇠별꽃을 보며, 별들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시도 떠올려 봅니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
‘무한’을 상상하노라면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역설적으로 지금 현재의 이 순간들이 너무나 소중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제 나도 아무 걱정 없이 하늘의 별들을 헤아려 보고 싶습니다. 내 눈에서는 여전히 반짝이나 실재로는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별들, 무의미할 것 같기도 하나 영겁의 시간 속에 나에게 허용된 이 짧은 시간과, 이 삶... 잘 살아내고 싶습니다.
내일이면 두통 없는 아침이 쉬이 오고 다음 날 또 남은 밤이 오겠지요.
그때는 또 다른 별들을 헤아려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보렵니다.
조용히 열리는 가을날의 아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