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를 쓴 지 얼마나 됐을까 한 10년은 흘렀을까.
나이를 먹어 가면서 언젠가부터 자꾸만 뒤를 돌아다보게 된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것은 반성의 의미도 있지만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은 나이에 지나간 세월에 집착하는 나를 보는 것이 좋지 않다고 여겨져 안 그러려고 노력은 하지만 자꾸만 다시 그렇게 되는 모습에서 그저 담담한 세월을 느끼고 있다.
며칠 전 청담동 빌딩 공사 건으로 서영 씨가 중개해 주기로 해서 서영 씨와 그리고 서영씨 자녀들과 근처 호텔 뷔페에서 식사를 함께한 적이 있다. 서영 씨는 이번 일에 여러 가지로 도움을 주게 된 분으로 이 동네에선 발이 넓기로 유명한 여자이다. 예쁘장한 미모와 괜찮은 말재주로 사업 중개에 수완이 뛰어나단 말을 들어 연락처를 구해 함께 일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번 건과 같이 상대방 쪽이 꽤나 까다롭게 구는 경우엔 말재주가 좋은 여자가 중개자로 나서주는 것이 모양새로 보나 실효로 보나 아무래도 직접 나서 뻣뻣하게 하는 것보단 낫지 않겠냐는게 내 판단이었다.
그러던 차에 서영 씨 딸자식이 학교서 상을 받았다길래 할 말도 있고 해서 식사 자리를 주선하게 되었고 서영씨와 딸 그리고 그보다 2살 어린 아들 영일 군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다. 식사는 그저 무난해서 사실 특별히 기억날만한 것이 없었지만 서영 씨의 아들-영일군과는 어떻게 기회가 닿아 따로 다시 식사를 하게 되었고 그 덕분에 그간 지나온 세월을 반추하는 계기가 되었다.
영일이는 나이가 22살이라고 했던가. 꽤 영리해 보이는 밝은 미소를 가지고 있었고, 말도 조리 있게 하던 편이어서 좋은 인상을 주었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사리분별이 빠르고 정확하여 자기 일을 꽤 능숙하게 처리하는 듯싶었다. 젊은 사람이 가끔씩 보이는 그런 경솔함이 없진 않지만, 또 약간의 경솔함이란 기분 좋은 느낌까지 주며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레 단단해지는 것이니만큼 나중에 이쪽 사업을 하더라도 더 잘 해내지 않을까 하고 그렇게 상상했다. 인정하긴 싫게도 기수 녀석보단 이 녀석이 적어도 이쪽 일에는 더 낫지 않겠느냐고 여러 가지로 비교를 해보기도 했었다. 예전엔 기수 그 녀석에 대해서도 크게 신뢰하며 흐뭇해하던 그런 때가 있긴 했지만 언제부터일지 어딘가 미덥지 않아 보이는 구석이 슬슬 보이기 시작했다. 대학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녀석이 혼자서 끙끙 앓는 게 결국엔 지 몫을 해내나 싶어서 나름대로 꽤 괜찮게 키어놨구나 했는데 대학 졸업하고 아내가 고인이 되고 나서부턴 왠일인지 하는 일마다 실패를 거듭하더니, 이젠 기껏해야 나가 산다고 돈이나 빌려달라니 어쩐지 요즘엔 어릴 때 보이던 그 영리함이며 생기며 모두 잃고 난파선처럼 방황하는 것이 안쓰럽기 그지없다. 깊은 바다 같은 압박 속에 침잠해가는 기수를 보자면 예전에 내가 그랬던 길을 더 힘들게만 걸어가는 게 아닐까 하는 그런 암담한 기분이 들 때가 종종 있다. 나 또한 10대에 홀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지독한 고독과 가난과 무기력의 나날들로부터 도망치듯 결혼하기 전까진 도저히 삶을 견뎌내기 어렵겠다고 포기하려던 날들이 있었다. 몇 년 전 아내가 병들어 죽은 후 기수에게 나의 과거가 유전되지 않기를 얼마나 기도했던가. 가끔씩 기수의 말수가 없어 냉랭하면서도 어두워진 얼굴을 마주할 땐, 속에서 화가 끓어올라 뭐라도 외쳐주고 북돋아 주고 싶지만 막상 입을 열려면 열기에 제풀에 무너져 결국 침묵만이 맴돌곤 했다.
영일이 녀석과 내가 말이 좀 통하는 듯이 보였는지 서영 씨가 나하고 녀석-영일-과의 점심 약속을 따로 주선하겠다고 많이 좀 가르쳐달라고 너스레 떠는 바람에 이틀 후에 함께 점심을 하기로 약속해 버렸다. 경험이 많은 사람 입장에서 젊은 사람에게 이러쿵저러쿵하는 게 아직도 어쩐지 어색했고 심지어 약간 성가심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래도 젊은 시절 자체에 동화되었는지 쉽게 약속을 해 주었던 것이다. 기수 때문에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서이기도 했지만 진심은.. 아마도 향수 때문이었을 것이다. 영일군과는 별다른 대화는 없었지만 식사할 때 하얀 냅킨을 손에 조물거리는 모습에서 어쩐지 과거를 떠올렸다. 손톱 주변이 거칠었던 녀석의 투박한 손에서 젊은 시절 지금은 고친 손톱 주변을 물어뜯는 버릇을 상상하게 했던 것 같다. 회상이란 복잡한 정신세계에서 특별한 키워드를 가지고 실행되는 것이어서 어떤 유사성에서 비롯되었는가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기억된 시간이란 대화 내용 자체가 얼마나 대단했느냐 하라기보다도 그 상황이 나에게 어떤 인상을 남겼는가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진다. 아닌 게 아니라 바쁜 업무처리에도 불구 하도 영일이와의 대화 속에 담긴 요구 탓인지 실제로 영일이와의 대화는 그리 대단할 것은 없었음에도 현재의 내겐 그 기억이 가장 강열하게 남아있다. 지금도 어쩐지 영일이가 손을 조물거리는 모습에 겹치는 묘한 인상이 이상하게 감당하기 힘든 그런 기분이 드는 것이다. 과거에 대한 요구가 강렬할 시기는 지난 듯한 나이라 그것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긴 뭐 하지만 불현듯 강하게 끓어오르는 슬픔은 때론 정말 감당하기 힘들게 여겨질 때가 있다.
영일군과 점심을 하면서 처음엔 건축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였다. 경영학을 배우는 학생이라 이쪽 일에 관심이 많은 데다 아직 어리다 보니 실제적인 정보가 적어서 실무에 관해서 다양한 경험담을 이야기해 주고자 했다. 15년 전쯤 직접 시공 담당을 했던 독일 문화관과 K 건물 공사 때의 일부터 시작해 젊어서 잠시 미국에서 일할 때의 경험, 하O트 호텔의 폭발 소동으로 인한 업무 차질 등.. 한편으론 영일이 역시 나같이 지긋한 어른과는 많은 대화를 해보지 못했던 터인지 이런 자리에선 사사로운 얘기보단 오히려 실무적인 것에 대해서나 여러 가지로 배워 가는 게 자기에게 득이라고 생각하는 듯이 여겨져 나 역시 편안한 기분으로 그런 얘기를 늘어놨던 것 같다. 식사를 하고 후식으로 커피를 마시기로 했는데, 이제는 좀 친근하게 느껴졌던지 기어이 사적인 일들도 슬슬 털어놓기 시작했다. 이 이야기는 따듯한 실크로 돌돌 말려있어 어느 자리에서라도 약간의 온풍만 불어준다면 가볍게 풀려나올듯한 그런 느낌으로 부드럽게 펼쳐 나갔다. 서영 씨가 그래도 날 꽤나 신뢰해 준 다는 생각이 잠시 머리를 스치면서도 한편으론 역시 젊긴 젊구나 하고 생각되니 속으로 가벼운 한숨이 나왔다. 만난 지 얼마 안 된 어른에게 여자친구, 성적 그리고 종교에까지 흘러가는 이야기는 약간 당혹스러우면서도 푸르고 부드러운 열정의 미숙함에 미소가 지어졌다. 동시에 영일이가 만난 지 얼마 안 된 나를 믿고 이 정도까지 말할 수 있게 이끈 건 서영 씨 공이 아닌가 하고 또 그렇게 생각되었던 것이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난 후 영일이를 데려다주고 또 경기도 시흥 쪽 건물 처리를 위해 여러 군데 들리고는 밤늦게야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으레 그러하듯이 샤워를 하면서 20분 정도 가만히 앉아 생각하다 보니 근 몇 년간 묵혔던 일기장이 생각이 났다. 아내가 고인이 된 후 함께 강제로 묻어버렸던 기억의 흔적이었다. 젖은 몸을 닦으며 후끈한 기운에 짐을 뒤지기 시작했다. 요새는 일기를 쓰지 않기도 하거니와 예전 일기장을 읽은 지는 이 집에 이사 오기도 한참 전이니 약 10년은 돼버렸던 듯하여 그 위치조차 종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기장은 베란다 구석진 곳에 먼지 쌓인 상자에 담겨있었다. 먼지를 털고 상자를 열자 곰팡이 냄새가 푹하고 얼굴을 뒤덮었다. 어렸을 때부터 곰팡이 냄새를 좋아하는 버릇이 있었던 탓인지 마치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한 그런 기분이 들었다. 언젠가부터인지 꾸준히 과거를 되돌아보기 시작하면서도 한편으론 일기장에 대해선 기억조차 못 해 왔던 까닭도 있을 것이다.
그날은 홀로 잠을 자지 않고서라도 몇 권의 일기장 전체를 한 번에 쭉 읽어 볼 열정으로 가슴이 후덥지게 더워졌다. 일기들을 읽다 보니 세월의 무상함에 쓴웃음이 지어졌다. 예전의 정열과 진실을 갈구했던 젊음이 무상하면서도 그립고 슬퍼져 때론 눈물이 흐르기도 했고 그 엉뚱함에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일기 속 남자의 고통이 희미하고 뭉클하게 다가왔고 때론 젊음의 미숙한 열정이 재밌게 여겨졌고 한편으론 그걸 다시 보면서 그때 마음이 다시 살아나는 존재가 즐거웠던 것이다.
일기를 몰입해 읽으면서 젊을 적 삶의 요구가 주로 종교와 인생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는 사실을 다시 알 수 있었다. 삶의 목적과 의미는 어디에 있으며, 종교란 무엇이고 죽음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고민되고 있었다. 삶을 회의 그 자체로 평가하면서도 반대로 지독한 고독을 성실성으로 이겨내려고 수없이 삶을 강조하기도 하는 그런 모순 가지고 있었고, 동시에 성스러움에 대한 추구로 이 두 모순을 극복하고자 시도도 있는 그런 젊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일기장은 미리부터 인생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다. 한계령의 가사처럼 '저 산은 내게 내려오라 말하네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처럼 인생은 오직 괴롭고 지치고 신물 나는 것이어서 모두가 모두의 시간을 견디기 위해 열정의 마약에 빠지려 정치를 하고 사랑을 요구하지만 이미 반항은 죽었으며 숨죽이고 꿈속에만 허덕이는 그런 비참만이 오로지 진실이어서 만약 이별을 하고 사별을 겪더라도 비극적 상황이 연출된다면 그나마 다행이고 오히려 시간이 지나고 추억이 소멸되고 현실은 자꾸만 무엇인가를 요구할 때, 인간은 메마른 무감각의 비참만을 맛보게 되는 게 우리 인생의 피할 수 없는 절실한 진실이 아닌가 하고 그렇게 비난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반대로는 육체를 거느린 삶의 주인으로서 인생을 창조하며 권리를 요구해야 하는 게 또 인간인 것이며, 시간의 주인의식을 가지고 때론 약해지더라도 치열하고 끈기 있게 눈을 떠 맹목적이라도 성장하기 위해 삶에 봉사를 멈추어선 안 된다고 그렇게 삶의 희망을 또 인생의 행복을 간절하게 요구하기도 하였다. 이런 일기들이 누구보다 절실히 요구한 젊음의 것이었던 탓인가. 그것은 애처롭게로 주름을 타고 서서히 흘러 내려가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일기의 마지막 장을 덮자 묵직한 슬픔이 검은 강가의 밀물 마냥 쓰잔 하게 밀려왔다. 그저 그 시대가 그리웠고, 어머니가, 아내가 그리웠고, 그 젊음이 그리웠다. 그토록 바라던 삶에 대한 의미가, 안타까운 산 정열이, 인생 전체의 무게를 억지로 짊어지고서라도 걸어갈려는 그런 젊음이 그리웠다.
하지만 '그것은 잊히지 않았다. 바로 이 일기장 속에 아직 살아 숨 쉬고 있다.'라며 다시 붙잡고 싶었다. 주인과는 떨어진 채 이 종이 쪼가리 속에서 영원히 살아갈 내 청춘의 슬픔이 지금의 초라한 늙은 육신을 무겁게 축이고 있었지만 반대로 늙은 이 안구를 통해 다시금 타 올라가고 있었다. 이젠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다.
잠시 심장을 데웠다 의자를 타고 미끈하게 흘러내려가는 그것을 바라보았다. 머리는 공허하고 몸은 공중에 떠 거꾸로 돌기 시작했다. 잡고 싶었다. 이젠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었다. 언젠가부터 기수의 고통에 대해 침묵할 수밖에 없을 때 절실하던 그것이 다시 한번 빠져나가게 그렇게 두고 보긴 싫었다. 또다시 멍청히 당하기는 싫었다. 입김은 뜨거웠고 숨소리는 방안을 요동쳤다. 그림자가 온 공간을 퍼져가면서 떨리던 손으로 의자를 꽈악하고 붙잡아 버렸다.
지금까지의 삶을 하나하나 반추하기 시작했다. 시간은 수많은 불연속적인 사건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호흡의 뜨거움은 시간의 벽을 타올라 모든 것을 하나하나 되새기길 요구했다. 지금껏 이어온 고독과 허무 그리고 내 사람들의 죽음은 모든 것들을 엉망으로 뒤엉켜 버렸다. 몇 개의 줄기들은 하늘을 막고, 뿌리를 내려 숨통을 조이고 생명을 빨아먹고 있었다. 그것은 자연스럽지 않았다.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다. 인간은, 사랑은, 내가 꿈꿔왔던 모두는 도대체 어디에 갔는가. 죽어버린 심장으로 이미 10년을 넘게 살아왔다. 현실에 충실하자 해놓고는 현실 속에 죽어버린 지가 벌써 10년인 것이다. 이미 멈춰버렸던 심장은 사랑하는 이의 고통에 아무런 대답을 줄 수가 없었고 오로지 비참에만 처절하게 짓밟혀 걸어왔다. 이는 더 이상 안 된다. 더는 허용해선 안 된다. 고 누군가 외쳐대고 있었다. 그토록 과거를 열망한 까닭은, 이 비참에 대한 저항이, 그래도 늦지 않은 희망이 아직은 이 심장 속에 살아왔단 증거 아니겠는가. 이 일기장 속에 담긴 진실은 아직 멈춰져서는 안 된다고 내 스스로 고백해 왔던 것 아니겠는가. 하고 외쳐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