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워크스페이스 '데스커라운지'에서 일을 했다. 이날 오후엔 일친구들과 하루를 회고하는 프로그램에 참석했다. 메타 동북아 마케팅을 총괄하는 서은아 작가님의 <응원하는 마음>이라는 책의 구절을 카드로 만들어, 본인에게 필요한 응원을 뽑고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마침 프로그램에 참석했던 일친구가 서은아 상무님과 전 직장을 함께 다닌 동료였다고. 십여년 전 선후배로 만난 옛동료, 서은아 상무님은 그 당시에도 에너지가 넘치고, 타인에게 건강한 영향력을 주는 분이라고 하셨다. 응원대장 올리브의 삶은 과거에서부터 이어져 오는 듯 했다.
나 또한 오늘 일친구가 나눠준 이야기처럼, 업계에서 많은 이들이 함께 일하고 싶은 선배들과 일을 했었다. 회사 밖을 나온 지금 '그때 그 OOO은 어떤 사람이었어?' 라고 묻는 이들에게 '행동력이 좋은 사람', '늘 아이디어가 끊이지 않고 새로움을 찾아다니는 사람', '괴짜같지만 그래서 뾰족한 디테일을 낼 수 있었던 천재'같은 표현으로 그들을 회상하곤 했다.
수지님은 어떤 사람이에요?
- 수지님은 무엇을 잘 하는 사람이에요?
- 수지님은 10년 뒤에 무엇을 가르치고 싶은 사람이에요?
- 지금까지 몇 번을 만났지만, 사람들에게 수지님을 소개시켜주고 싶어도 뭐라고 할 지 모르겠네. 그러면 본인을 잘 팔지 못하고 있는 거 아닐까?
올 해 나에게 가장 많은 배움을 만들어주신 분으로부터 '나는 어떤 사람이냐'는 질문를 여러번 받았다.
매일을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아차. 반 년간 축적된 시간차 공격에 답답함이 가득차서 펑 터져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는 일로 정의할래? 그래 기획자.
그래서 무슨 기획? 무슨 기획자인데?
프리랜서가 된 이후로 6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고, 주말에도 스위치를 꺼두지 않았다. '열심히'는 이미 차고 넘치게 하고 있으니, 답답함을 해소시킬 솔루션이 시간이 아니란 건 알겠다. 정말 잘 하는 일에 집중 해야할 때다. 길진 않았어도 최근에 꽤 오래 대화를 나눈 이들조차 '그래서 이수지라는 사람이 뭘 하는 사람 같아?'라는 말에 쉽게 응답하지 못하고 있다. 나의 모호함을 날 것으로 증명받는 순간이었다.
최근 새로운 프로젝트를 연결해준 친구에게 고마움을 담아 선물을 보냈었다. 본인에게 각별한 지인의 일에 나를 믿고 추천해줄 수 있다니, 게다가 너는 나에게 벌써 세 번의 연결을 만들어주는구나. 이 친구가 살면서 쉽게 만나기 어렵다는 '내 삶의 다운로더' 처럼 여겨졌다. 그 역시 맞는 말이다.
"너가 능력이 없었다면 소개를 안했겠지. 그거 다 너가 일을 잘했기 때문이야."
맞아. 이 친구는 유들유들한 겉모습과 달리 일에 있어선 참 냉정한 친구였다. 그런 사람이 나를 연결시켜준 거라면 난 꽤 괜찮은 기획자인 것이다. 이 친구가 나의 최대 다운로더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살가운 마음도 있지만, 나와 가장 긴밀하게 일하며 날것의 일들을 지켜봐온 전 동료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전 직장을 퇴사한지 1년을 앞두고 있다. 지난 시간동안 나는 비슷한 질문과 답변 사이에서 드는 불편감을 애써 눌러 왔었다.
- 요즘 잘 지내? 뭐하고 지내?
- 너가 하는 일이 그래서 뭐라고 했지?
-누나는 어떤 사람 같냐고? 바쁜 사람. 가능성이 많은 사람? 뭐라도 될 거야!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난 얼마나 구체적으로 적극적으로 떠들고 다녔나. 주변의 반응은 너무나 당연했다. 일에 대한 성과, 결과물이 있어야만 일 얘기를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일'이 아닌 '일의 태도'가 주제가 되더라도 글감은 넘쳐났다. 알리지 않은 건 나였다. 회사 밖으로 나온 맨몸의 기획자에게 일을 준다는 그 자체가 고마워서 내가 해야 할 '일의 바운더리'조차 잡지 않고 일을 떠맡아 왔다. 파편처럼 튀어오르는 일들은 꾹꾹 주워 담더니, 남은 기록은 아무데도 없다. 정작 나도 내가 무슨 일을 해왔는지, 얼마나 어떻게 해나가게 될 지 갈수록 흐릿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바빴다. 불안했다. 정신승리와 불안 사이에서 싸웠다.
나의 뿌리를 단단하게 내리지 못하는 와중에도 누군가 알아주길 바랬다.
바쁜 사람. 이것저것 많이 해본 사람.
... 아마도 애쓰는 사람
이대로 애쓰는 사람으로 남으면 어떡하지?
사회초년생 시절부터 '애쓰지 않기'와 '힘 빼고 일하기'는 수년째 내려오는 나의 인생 미션이거늘. 애쓰는 삶이란 지독한 관성으로 날 제자리에 돌려 놓는다. 나는 진심으로 일하는 사람 이수지의 키워드가 날이 서있기를 바란다. 나다움도 없고 나의 뾰족한 분야도 없이 애만 쓰며 일하는 사람은 정말 되고 싶지 않다. 난 정말로 나를 못 파는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