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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잉지 Aug 15. 2019

우리는 품위 있는 삶을 원한다

『근린생활자』 배지영



 어떤 가난의 재현을 보면 화가 치밀었다. 철저히 가난 밖에서 살아온 이들이 결코 넘지 않을 선 밖에 선 채로 그들의 상상 속에 존재하는 가난의 특성을 가난이라 명명하고 한정 지으며 그것을 연민하거나 동경하려 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타인의 가난과 고통을 소비하려 드는 것이 불편했다. 그런 태도는 모멸감을 줬다. 타인의 현실을 액세서리로 차용하려는 불쾌한 시도를 몇 번인가 마주하고 나서 사회의 약자를 인물로 내세우는 이야기를 접할 땐 나도 모르게 앞서 날을 세우게 됐다. 『근린생활자』를 펼쳐 들 때도 기대와 설렘 한구석에 묘한 경계심이 깃들어 있었다. 고맙게도 괜한 의심의 눈초리는 페이지를 넘어가며 빠르게 수그러들었다. 두려움이 무색하게 마지막 장을 덮으며 그의 이름 세 글자를 단단히 새겼다.






 『근린생활자』 속 인물들은 지극히 평범한 이 시대의 약자들이다. 그들은 성실함과 아무것도 묻지 않는 무던함으로 자리를 보전하고 생을 연장해왔다. 성실은 그들의 능력이자 경력이었고, 삶의 밑천이자 생의 수단이기도 했다. 또한 말단이나마 누구보다 성실히 일 해왔다는 자부심은 자기 긍정의 핵심적 요소였다. 그러나 그것은 순수하게 자발적이기만 한 성실성인가?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는 육체노동자로서의 위치는 그들로 하여금 사람을 일개 소모품으로 보는 회사에 투신하게 하고, 빠듯한 생의 의무를 진 사람들은 작은 혜택에도 수많은 의문을 폐기한다.


 부조리에 침묵하는 그들에게는 각자의 로망과 희망에서 말미암은 욕망이 있다. 그들은 가지지 못한 것들을 향해 꾸준한 열망의 눈길과 손짓을 보낸다. 하지만 가져본 적 없기 때문일까. 실상 그들이 원하는 것은 아주 작고 사소한 것일 뿐인데도 작은 목표를 탐하는 술수는 어딘가 불안하고 허술하며, 엉성한 시도는 하나같이 실패로 귀결한다. 버거운 빚을 지며 사들인 집은 더 큰 빚으로 돌아오고(「근린생활자」), 행복한 노후를 꿈꾸며 산 땅은 사랑하는 동생네 가족을 죽이고 자신마저 파멸로 몰아넣는다(「그것」). 단 900원의 임금인상을 위한 파업은 끝없는 어둠 속에서 죽음으로 끝난다(「삿갓조개」). 현실과 다를 바 없는 냉혹한 소설 속에서 그들의 ‘로망’이란 아주 보잘것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실현되는 법이 없다. 그들의 실패와 죽음은 누구에게도 전해지지 못하고 날카로운 가위 끝에서 어렴풋이 유추될 뿐이다. 그들은 가난의 굴레에 속해 있다. 그곳을 빠져나가려는 자는 온갖 방해에 직면한다. 성공은 어렵고 실패는 너무도 쉽다. 돌아온 자리는 이전과 같거나 조금 더 낮다.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큰 이익을 위해선 작은 희생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 고(「그것」). 물론 여기서 희생의 크기를 평가하고 희생을 감수할 사람을 선택하는 것은 희생자가 아닌 권력자다. 밑바닥에 선 이들은 설마 죽이기까지 하겠냐고 께름하게 묻지만 바깥의 이들에게 그들의 목숨이란 ‘작은 희생’에 지나지 않는다. 강요된 희생의 조건을 거절하는 자는 곧바로 제거해야 할 존재가 된다. 그들은 처음부터 알려져서는 안 되는 존재, 쉬쉬해야 하는 존재였다. 조용히 침묵해야 할 그들이 반항하고 소리치며 무언가를 요구하기 시작하는 것 자체가 권력자에겐 불필요한 위협인 것이다. 당사자를 배제한 문제의 바깥에서 사실들은 멋대로 각색되어 전해지고, 불가피한 선택은 태업의 증거가 된다. 존엄과 생계의 최저 조건을 위한 투쟁은 손쉽게 민폐가 되고 경제적 손해로 환산된다. 비난의 손가락 끝에 선 그들에게 세상은 ‘오히려 상처 받은 눈빛’(「사마리아 여인들」)을 하고 있다.


“무는 개를 돌아본다고 하잖니. 사람이든 개든 순해 빠져선 안 돼. 결국엔 지가 물리게 되거든.” (「그것」) 그러나 이빨을 드러내는 순간, 그들은 죽는다. 그러므로 살아보려는 몸부림은 자기 파괴 행위가 된다. 억울한 사정은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한다. 그러니 물어보자. 죽지 않기 위해 물어뜯기를 선택한 그들이 진짜 세상의 악이나 위협인가? 살아보려고 지른 외마디 비명이 정말로 이기심인가? 그들의 삶보다 당신의 경제적 손해가 더 중요한가?     


 녹록지 않은 시간을 살아남은 사람들이 사소하지 않은 희생들을 치르며 닿은 곳은 빚더미이거나 기약 없이 유예된 기대, 혹은 먼지 통 속의 머리카락이다. 도달한 실패와 좌절과 죽음에서 그들은 오히려 편안함을 느끼는 것 같기도 하다. 한평생 벗어난 적 없는 불안과 절망의 향기는 차라리 익숙한 것인지도 모른다. 피인지 땀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는 것을 자꾸 울음이라 착각하면서 그들은 깨닫는다. '이제는 글러먹었다는 걸 (...) 더 이상 예전의 활기를 찾을 수 없다는 것도. 그 모든 것을 이제는 운명처럼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것도.' (「청소기의 혁명」)


 이런 현실이 못 견디게 불만스러워도 삶의 속도를 줄일 수는 없다. 삶은 계속되고 우리에겐 끊임없이 내일이 주어진다. 꺾이는 무릎으로 허청허청 성실한 희생양이 되거나 이빨을 드러낸 후에 도살되는 것 외에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무엇인가? 그러니 어쩔 수 없다. ‘넘어지거나 구를 게 뻔’하다 해도 ‘울음 같은 웃음도 달음박질도 그리고 눈물도 멈출 수가 없'(「사마리아 여인들」)으니 거대한 내일로 달려갈밖에. 다만 그 고달픈 길이나마 팔짱을 내 줄 사람이나 노란 바람개비를 포기하지 않을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그 ‘길’은 좌절한 우리가 다시 일어날 때까지 고양이 털 따위와 함께 오래도록 우리를 기다려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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