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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잉지 Apr 04. 2020

죽음이 아닌 삶을 원해요

사마에게 (For Sama, 2019)


즐겁고 아름다운 책과 영화를 좋아하지만, 가장 끈질기게 챙겨 보는 건 아프고 고통스러운 컨텐츠다. 

내게 깊은 상처를 내는 것들. 숨이 턱턱 막히도록 분노케 하는 것들. 너무 많이 울어서 끝난 후엔 온몸에 구멍이 난 것처럼 느끼게 하는 것들. 죽음보다 깊은 절망 앞으로 끌고 가 고개를 돌릴 수 없게 만드는 것들. 그래서 알고 난 후엔 알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하는 것들. 


알아가려는 노력 속에서 상처 받는 경험과 그것을 통해 고통의 감각을 되새기는 것이 내게는 너무도 중요하다. 알아야만 행동할 수 있고, 알아야만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지난날의 고통을 마주하려는 것은 그런 이유다. 그것이 얼마만큼의 고통이든 고작 아는 고통이 겪는 고통에 비할까. 그런 생각을 하면 겨우 다짐 앞에서 이렇게 비장한 내가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한 부모님을 고소하고 싶어요" _<가버나움>



영화 <사마에게>는 민주화의 거점이던 시리아의 도시 알레포를 배경으로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시민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독재자 바샤르 알아사드의 퇴진을 요구하며 2011년 3월 시작된 시리아의 민주화 운동은 국제 사회의 이해관계와 맞물리며 정부군과 반군 사이의 공방이 된다. 


이 영화를 보며 <가버나움>을 떠올리지 않기는 힘들 것 같다. <가버나움>에서 자인은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한 부모님을 고소하고 싶"다고 했다. <사마에게>에서 와드는 "이런 세상에 태어나게 한 나를 용서"해주겠냐고 묻는다. 둘을 뭉뚱그릴 수 없게 하는 분명한 차이들이 존재함에도 자인의 절규와 와드의 사과가 다른 것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불가해한 폭력 앞에 던져진 둘의 이야기가 겹겹의 층위로 겹치며 펼쳐졌다. 그 사이에 존재할 수많은 삶의 결을 어렴풋이 더듬을 수 있었다. 알지 못해서 느끼지 못했던 얼굴들이 부옇게 떠올라 부피를 차지했다. 


일상적으로 폭격이 쏟아지는 생은 어떨까. 매일 알던 사람이 떠나가고 죽어가는 삶. 내 곁의 누군가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삶. 전쟁 속에서 태어난 삶은 어떨까. 태어나서 겪은 것이 전쟁밖에 없는 삶. 


와드는 폭격으로 환자들이 쏟아지는 날이면 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나간다. 


"살아있는 사람이 보고 싶어요"






매일 폭격이 쏟아지는 곳에서도 아이들에게 평범한 추억을 만들어 주고 싶어 한다



<사마에게>가 보여주는 수많은 전쟁의 단면 중에 폐허 속 도심에 병원을 준비하며 벽에 그림을 그리던 장면이 떠오른다. 감 하나를 받고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뻐하던 얼굴과 폭격에 까맣게 타버린 버스에 색색깔 물감을 칠하며 놀던 아이들도(아이들은 버스에 떨어진 것이 '확산탄'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쏟아지는 폭음에 자장가 멜로디를 얹으며 전쟁 속에서도 삶은 이어진다. '일일 폭격 드라마'라는 우스갯소리와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집을 잃은 꼬마'같은 이야기 속에서. 인간은 단숨에 죽어버릴 만큼 약하면서도, 또 얼마나 강한 의지를 가졌나. 그런 걸 생각했다. 


와드는 폭격으로 병원과 동료들을 잃은 직후에 그곳을 떠나며 말했다. 알레포에선 슬퍼할 여유가 없다고.

우리에게도 슬퍼할 시간은 없는 것 같다. 좌절이나 절망, 무력감도 사치처럼 느껴진다. 


아이들이 우리의 미래라는 말에는 동의하지 않지만(아이는 그들 자신의 미래다),

아이들에게도 미래를 줘야 한다. 트라우마가 없는 미래를.


"널 위해 카메라를 들었어"_<사마에게>



이 영화를 많은 사람들이 목격하면 좋겠다. 알레포에서 일어났던 독재와 학살의 증인이 되고, 나아가 집단의 의무와 죄의식을 공유하는 연대의 일부가 되면 좋겠다. 


<빈폴>에서는 전쟁 중 부상으로 전신이 마비된 병사가 짐이 될 것이 두려워 죽음을 택하며 아내에게 말한다. 

"전쟁 때문에 미안해"


우리는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한다. 끝난 적 없는 전쟁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그 과정에서 희생되는 것은 누구이며, 사과를 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은 왜 구조에 희생된 개인이어야 하는가. 그리고 그것이 정말로 타인의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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