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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잉지 Aug 05. 2022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손

<미애>, 김혜진


그네에서 뛰어내리다시피 한 해민이 달려왔다. 미애는 턱까지 내려온 해민의 마스크를 제대로 씌워준 뒤 아이의 손을 잡았다. 아니, 작지만 단단한 아이의 손이 먼저 미애의 손을 한껏 움켜쥐었다. _김혜진, <미애>



여러 번 들러 오랜 시간 머문 인도의 어느 도시엔 나보다 스무 살쯤 어린 친구 하나가 있다. 우리는 자주 강변에서 만나 함께 시간을 보냈다. 종종 함께 저녁을 먹었고, 그보다 더 가끔 동네의 후미진 골목들을 산책했다. 그날은 우리가 싸웠다가 일주일 만에 화해를 한 날이었다. 며칠을 서로 눈치만 보며 삐죽대다가 저도 나도 다른 친구들에게 등을 떠밀렸다.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미안해” “나도 미안해” 작게 속삭이고 뜨겁게 포옹한 뒤에 그 애는 날보며 환하게 웃어주었다. 그제야 마음이 편했다. 


“우리 이제 화해한 거지? 그럼 사진 찍으러 가자.” 


그 애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냅다 내 손을 잡더니 이전엔 가본 적 없는 방향으로 힘껏 달리기 시작했다. 조그만 게 힘이 어찌나 세던지. 좀처럼 달리지 않는 나는 꼼짝없이 손을 붙들린 채 허리를 반으로 접고 고꾸라질 것처럼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계단을 올랐다.


그렇게 도착한 낯선 동네에서 우리는 오래된 즉석 사진기로 두 장의 사진을 찍었다. 그 애는 늘 나에게 마음에 드는 것을 먼저 고르라고 한다. 한 장씩 나눠가진 사진을 가방에 넣는 걸 확인하더니 그 애는 곧 다시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곧장 다른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어어, 잠깐만. 조금만 천천히.”


그 애는 엉거주춤 끌려오는 날 보며 그저 와하하 웃었다. 어쩔 수 없지. 나도 와하하 웃는 수밖에. 늦은 저녁 좁고 낮은 주택가를 휘청휘청 달리며 우리는 와하하, 와하하 웃었다. 와하하 웃는 우리를 보며 지나던 사람들도 와하하 웃었다. 누군가 물었다. “어딜 가는 거야?” 나는 대답했다. “나도 몰라!” 가로등도 없는 흙길에 영문 모를 웃음소리가 요란했다. 


그러다 어느 모퉁이에서 삐끗, 발을 헛디뎠다. 순간 영락없이 넘어져 엉덩이가 깨지든 머리가 깨지든 하겠구나, 생각했는데 잡고 있던 손이 나를 불쑥 잡아당겼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단단하고 강한 힘이었다. 미끄러지려던 몸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는 채 세워졌을 때, 곧추 일어난 건 몸만이 아니었다. 그때 내 마음속에서도 무언가가 불쑥 일어났다. 정말이지 눈 깜짝할 새 일어난 일이었다. 


그날 내 안에서 솟아난 것은 기둥처럼 단단하고 높은 심지 같기도 하고, 무엇이든 지을 수 있는 넓고 든든한 기단 같기도 했다. 나는 가끔 작고 단단하고 예측할 수 없는 그 손에 의지해 일어난 내가 그 손에 의해 일어난 기둥을 붙들고, 그 손이 다진 기단 위에 오늘을 쌓고 있는 것 같다고 느낀다. 속절없이 흐무러지려할 때마다 불쑥 나를 잡아당겼던 손이 다시 나를 낚아채 곧추세운다. 그 손, 아주 따뜻하고 단단한 그 손과 그 손의 기억이 여전히 나를 붙잡고 있다. 언제든지 선명하게 왼손에서 그 감각을 떠올릴 수 있다. 그 힘을 감각할 때 나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굳세다. 우뚝 서서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다. 


그날 그 작은 손이 내 안에 일으킨 것은 무엇일까. 

그런 것을 일으킬 수 있는 힘은 도대체 무엇일까. 

전혀 알 수 없지만 그 손을 잡고 있을 때 나는 사는 일이 조금도 두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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