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태도
출근길에 문득 ‘진리란 무엇일까?’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신앙이 있는 사람은 성경 속에서, 신앙이 없는 사람은 각자의 경험 속에서 진리를 찾으려 하지만, 결국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진리는 ‘죽음’ 아닐까. 성경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한다.
나는 이 구절을 ‘죽음이 너희를 자유케 한다’라는 가정으로 바꾸어 보았다. 생의 끝자락이라는 렌즈로 지금의 삶을 바라본다면, 선택과 고민, 갈등의 무게가 달라질지도 모른다.
나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
그러나 술을 좋아하는 상사와의 회식 자리는 늘 불편했다. 상사가 나를 못마땅해하는 눈빛을 보내는 것 같았고, 그때마다 나는 작아졌다. 그런데 죽음을 떠올리니 마음이 달라졌다. 죽음 앞에서라면 상사의 평가나 눈치 따위는 얼마나 하찮은 일인가. 결국 나는 무알코올 맥주를 들고 회식 자리에 갔다. 반은 분위기를 배려한 것이었고, 반은 내 자신을 지키려는 선택이었다.
놀랍게도 그날 상사는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다. 건강을 위해 줄이기로 했다고 했다.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상사가 변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그러나 곱씹어 보니, 모든 것이 변해도 끝내 남는 것은 단 하나, 죽음뿐이었다.
죽음을 렌즈로 가정의 풍경을 바라본다.
큰 딸은 아침 목욕 후 벗어놓은 옷을 그대로 두고, 수건을 세면대에 걸어 놓는다. 매번 이야기하지만 고쳐지지 않는다. 아들은 스마트폰 축구게임을 너무 오래 한다. 약속한 시간을 지키지 않아 화가 치밀 때가 많다. 그러나 죽음을 생각하면 이 모든 화는 작아진다. 중요한 건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준다는 사실이다. 큰 딸이 집에 와 춤을 추며 우리를 웃게 하고, 아들이 동네 친구들과 축구와 자전거를 타며 뛰어노는 모습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감사다.
돈 문제도 마찬가지다. 자녀가 커 갈수록 돈은 점점 더 필요하고, 나도 삶을 누리고 싶다. 그러나 들어오는 돈은 한정돼 있고 나가는 돈은 많다. 절약은 하지만 늘 빠듯하다. 가족들의 요구를 다 들어주지 못할 때면 답답함이 몰려온다. 하지만 죽음을 떠올리면 관점이 달라진다. 지지고 볶고 돈타령을 해도, 결국 함께 가정을 꾸려 살아간다는 그 사실이야말로 가장 큰 힘이고 버팀목이다. 돈은 흘러가지만, 함께 살아낸 시간과 관계는 남는다.
죽음은 두려움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비춰주는 마지막 거울이다. 언젠가 내 삶이 저물어갈 때, 나는 내 자손들에게, 그리고 내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나는 떳떳하게 살았다. 그리고 겸손하게 살았다. 그래서 내 삶은 아름다웠다.”
죽음을 진리로 삼을 때, 결국 우리에게 남는 질문은 단순하다.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아야 할까?
작은 선택 앞에서 눈치가 아닌 양심을 따르고, 이기심이 아닌 배려를 선택하며, 가족과 함께하는 일상에 감사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떳떳하고 겸손하게 살아내는 것, 그것이 결국 가장 아름다운 삶이 된다. 그리고 그 삶은 마지막 순간, 죽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진실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