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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음'의 비결은 뭘까?

by 개미와 베짱이

젊음은 한 때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 아니다. 젊음을 한 곳에 오래 붙잡아 둘 수는 없지만 노화 속도는 충분히 지연시킬 수 있다. 노력 여하에 따라 젊음을 즐길 수 있다. 그중 하나는 '운동'이다. 운동이 좋다는 것은 세상이 급변해도 변하지 않는 원칙이다. 운동은 젊음을 건강한 육체로 표현하는 수단이다. 젊은이 못지않은 체력을 유지하는 어르신들이 산증인이다. 열심히 노력한 결과이다. 또 하나는 '호기심'이다. 호기심은 정신적 건강의 발로로서 화산에서 용암이 분출되듯이 끊임없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운동과 호기심에 의한 젊음을 유지하는 것은 생활습관의 결과물이다. 내 마음가짐과 실천의지에 따라 젊음이 정도가 달라진다. 물이 담기는 그릇에 따라 물의 모양이 달라지듯 말이다.


젊음은 일반적으로 '나이'에 의해 사회적으로 재단된다. 바로 편견이다. 연령란에 숫자가 높을수록 젊음과는 거리가 멀다는 선입견 말이다. 아주 틀렸다고 단정하기는 다소 버거움이 있지만, 그렇다고 마냥 인정하기에는 억울함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행정학적 나이는 어쩔 수 없다고 치자.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없듯 오늘이 가고 내일이 오면 연령란의 숫자는 자동적으로 하나가 더해지는 셈법의 알고리즘으로 되어 있다. 이 알고리즘은 내 의지와 상관없다. 그래서 나이는 '먹는다'는 표현을 쓰는가 보다. 설날에 떡국을 먹으면 '한 살 더 먹었네'라고 얘기한다. 그 한 살은 어쩔 수 없다. 세월을 비껴갈 수 없기에 차디 찬 북서풍에 실려 오는 나이 한 살은 그냥 받아들이자. 다만, 육체적 젊음과 정신적 젊음은 내 의지에 따라 훨씬 젊어질 수 있고, 생을 마감할 때까지도 남들이 부러워할 정도의 청춘으로 살아갈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마음은 청춘인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는 표현은 '젊은 노년'을 포기한 것이나 진배없다.


호기심은 익숙함과 당연함 반대적 개념이다. 당연하기에 하나도 궁금하지 않은 것이 익숙함이라면, 호기심은 늘 궁금함으로 고개를 갸우뚱한다. 익숙함은 사회적 최대공약수이자 보이지 않는 약속이기도 하다.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경험치를 객관화시킨 것이 익숙함이다. 그래서 편리하다. 익숙함은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실용적인 경제 이론서이다. 다만, 편리함에 안주하면 제자리걸음이다. 한 걸음 내딛기가 귀찮아지고 두려워진다. 진일보할 수 있는 동력을 상실하기가 쉽다. 거듭되는 산업혁명은 익숙함보다는 생소함, 생경함의 결과물이다. 모두가 다 알고 있는 '만유인력 법칙'도 호기심에서 비롯되었다. 뉴턴이 길을 걷다가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왜 아래로 떨어질까?'라는 단순한 의문에서 출발되었다. 바로 호기심의 발현이다. 일상에 '왜?'라는 물음표를 매달아 본다는 것은 무모한 짓일 수도 있지만, 아무도 가지 않은 길에 첫 발을 내딛는 것과 같다.


호기심은 '씨앗'이다. 그 씨앗의 열매가 어떤 맛을 낼지, 모양은 어떠할지, 크기는 어는 정도일지는 오로지 내 몫이다. 4차 산업혁명시대는 궁금한 것이 천지에 널려 있다. 어제와 다른 오늘이 매일 새롭게 시작하기에 알고 싶은 것이 너무 많다. 쳇GPT 만 하더라도 오늘 분명 최신 버전을 배웠는데, 내일이면 또 다른 프로그램이 선을 보이는 21세기에는 배울 것도 많고 알고 싶은 것도 수두룩한 '평생교육'시대가 맞다. 오늘도 무엇인가 알고 싶은 욕구가 마음 한편에 똬리를 틀고 있다. 이런 호기심은 나이와 반비례한다. 어린아이는 온 세상 모든 것이 궁금하다.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날 줄 모른다. 부모는 아이의 궁금함을 해소시켜 주려고 오늘도 사투를 벌인다. '안돼!'가 아니라 최대한 아이의 질문에 답을 하려고 말이다. 그렇게 끝날 것 같지 않던 질문 공세도 아이가 성장하면서 급격하게 줄어든다. 학습으로 인지한 것도 있을 수 있지만 세상 이치를 깨달으면서 궁금한 것이 감소하는 것도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세상은 변한다. 변화의 속도가 덧셈방식의 산술급수적에서 곱셈방식의 기하급수적으로 바뀌고 있다. 그 변화 속에서 알고 싶은 것이 많아지는 요즘이다. 찰스 다윈이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것이 강하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오늘 하루 일상에 물음표를 던져야 한다. 호기심의 끈을 놓지 말자. 호기심은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개척하는 마중물이다. 거듭되는 산업혁명의 산물이 방증이다.


호기심은 관심이다. '관심'은 '관찰'을 낳고, '관찰'은 '관계'를 형성한다. 결국 호기심은 사람이던 사물이던 또 하나의 관계를 형성하는 연결고리이다. 그것도 아주 단단하고 튼튼한 연결고리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켜켜이 쌓인 경험의 높이만큼 연륜이 높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그 연륜이 호기심을 잠재우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호기심은 익숙함이나 새로움에 '왜?'라는 물음표를 던지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 물음이 호기심의 발원지인 '관심'이다. 그 관심이 쌓여 궁금증이 커지게 되면 관찰로 이어진다. 지속되는 관찰에서 '아하!'라는 깨달음을 얻었을 때, '관계'가 형성되면서 또 하나의 인연이 맺어진다. 호기심은 '왜?'라는 의문에서 '아하!'라는 성찰로 마무리가 되면서, 온 천하를 다 얻은 것과 같은 엔도르핀을 맛보게 된다. 엔도르핀은 즐거움을 선사하고, 즐거움은 젊은 유지의 비결이다. 나이가 먹을수록 익숙함을 버리고, 이타적 의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어떤 얘기를 하는지 집중해 보자. 궁금증이 또 하나의 깨우침으로 변할 때 그 기분은 정말 상쾌하다. '나 때는 말이야'는 정말 장롱 속에 꼭꼭 숨겨 놓자. 아니 숨기지 말고 아예 폐기처분하자. 모두가 손사래 치는 꼰대의 발원지가 '라때문화'이다. 익숙함에 물음표를 제기하는 것은 늘 개구쟁이 시절과 같은 천진난만한 생활을 유지하는 것과 같다. 인생이 확장된다. 경험과 경력이 넓어진다. 미래를 바꾸는 힘이기도 하다. 사칙연산 중 덧셈과 곱셈을 넘나 들면서 말이다. '꼭 그렇게 해야만 할까?' '다른 방법은 없을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오늘 하루도 신명나게 지내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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