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꽃잎 일곱 장

한 편의 영화, 글이 꿈이 되는 순간

by 글지은

고등학교 1학년, 한창 상상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다. 우리 학교는 공업고등학교였는데 그저 취업을 빨리하고 싶어서 선택한 곳이었다. 그래도 제일 마음에 들었던 건 고등학생이 되면서 도서관과 거리도 가까워졌다는 것. 다른 것보다 보고 싶은 책을 빌리러 도서관에 매일 들락날락할 수 있다는 사실이 제일 기뻤다. 학교가 끝나면 뒷문에서 곧장 5분도 채 걸리지 않는 도서관에 가는 게 나의 일과 중 하나였다. 친구와 헤어지고 도서관에만 들어서면 웃지 않는 내 얼굴도 펴지는 마법은 나조차도 신기했으니까.


초등학교 때부터 할머니와 난 같이 방을 썼기 때문에 밤늦은 시간까지 깨어있는 일은 드물었다. 농사철 고추 따는 시기가 오면 나도 고추밭에 나가야 했다. 주말엔 당연하듯 따라갔다 오면 피곤해서 항상 일찍 잠들었다. 온종일 고추 따기를 반복하고 나면 잠이 안 오려야 안 올 수 없을 만큼 피곤하다. 토요일마다 주말의 명화를 보겠다고 눈을 부릅뜨고 버텨보지만, 영화는 볼 수 없었다. 주말 저녁이면 오늘은 꼭 주말의 명화를 보고 말겠다는 일념으로 가득했다. 어떤 영화가 나오는지는 신문에 나오는 TV 편성표를 보고 알았다. 오늘 하는 건 로맨스 영화인가? 정도로 생각했다. 기필코 영화를 보고 말겠다고 방에 눕지도 않고 버텼다. 불을 끄고 잠들지 않으려 앉은 채로 영화만 기다렸다. 책 읽기로만 상상하고 만족하는 것에 그쳤던 마음이 정말 ‘쓰고 싶다’라는 마음으로 바뀐 건 텔레비전에서 본 영화 한 편이었다.


주말의 명화는 <당신이 잠든 사이에>라는 로맨스 영화로 1995년도에 나온 영화였다. 주인공 루시(샌드라 블록)는 아파트에서 고양이를 키우며 혼자 살면서 기차역에서 토큰 받는 일을 했다. 매일 같은 시각 지나가는 한 남자를 첫눈에 보고 반했다. 매일 그 사람이 말을 걸어온다면 인사를 어떻게 하지라는 상상을 했다. 그리고 다가온 크리스마스이브날, 남자가 기찻길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하면서 혼수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러면서 루시가 남자 주인공(빌 폴만)과의 좌충우돌 러브스토리로 이어지는 영화였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처음으로 시적인 글을 써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영화를 보면 루시가 혼수상태에 빠진 남자를 찾아가 혼자 독백을 한다.


“내겐 고양이도 있고, 아파트도 있고, 혼자 쓰는 리모컨도 있어요. 다만 함께 웃을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첫눈에 반한다는 말을 믿나요? 하지만 상대가 당신을 진정으로 알고 나면 건성으로 만나던 사람들을 뒤로하고 당신과 한평생을 함께 하고 싶을 거예요. 말도 해보지 않은 사람과 사랑에 빠져 본 적이 있나요? 너무 외로워 혼수상태에 빠진 남자를 찾아온 적이 있나요?” - <당신이 잠든 사이에> 중에서 -


나한테는 이 장면이 계속 마음속에 남았다. 약간의 울먹임이 섞인 여주인공의 담백한 듯하지만 외로움이 가득 묻어 나오는 장면이 계속 생각했다. 처음으로 시적인 표현으로 저렇게 뭉클한 글이 써보고 싶어졌다. 감수성이 깊어 봐야 얼마나 깊었겠냐만 그 장면은 잊히지 않을 만큼 깊게 마음속에 박혔다. 뭔가 제대로 글을 써본 적이 없었다. 하는 방법도, 어떻게 글을 써야 하는지도 몰랐다. 일기 쓰기도 싫어했던 내가 글은 써보고 싶어서 연필을 이리저리 굴렸다. ‘내가 이런 걸 어떻게 해’라는 생각과 하고 싶은 마음이 공존했다. 막연하게 공책에 낙서하듯이 한두 줄 써 가는 게 전부였다.


커서 핸드폰을 장만했을 때도, 개인 컴퓨터가 생겼을 때도, 영화를 내려받아서 볼 수 있게 되었을 때도 난 이 영화를 가장 먼저 내려받아서 저장했다. 이 장면만 지금까지 수백 번, 수천 번도 더 돌려보았다. 처음 시적인 글을 쓰고 싶었던 그날. 주말이 지나고 학교가 끝나자마자 도서관에 달려가 시집 칸부터 찾았을 만큼 독백 장면이 좋았다. 영화를 본 이후부터 목적은 시집이었다. 영화의 짧은 독백처럼 울림이 있는 글을 써보고 싶었다. 오직 시집에만 빠져 있었고 시가 배우고 싶었다.

사람 일이라는 건 참 모를 일이었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첫사랑을 만나는 설레는 장소가 도서관이 될 거라고 생각은 했을까. 대학교 실습 나가서 만난 조그마한 소녀가 시작의 꽃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긴 문장을 어떻게 이어가야 하는지도 몰랐고, 짧은 글귀만 쓰던 내가 글쓰기 모임으로 처음 들어간 게 수필이 될 거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아이를 키우기 위해, 살기 위해 아무리 애써도 제자리라고 느꼈던 시간이 있었다. 힘겨운 시간을 종결하고 싶었기에 유서라고 하기도 민망한 편지글을 남긴 게 전부였다. 그랬던 내가 단 한 권의 책이, 단 한 번의 계기가 마음을 살게 했다. 언제가 될지 몰라도 있는 그대로 평범하지만, 짧은 글을 이야기로 담아내고 싶어졌다. 무표정이던 여고생이 글쓰기가 해보고 싶다며 다시 공책을 잡고 연필을 굴리던 순간.


당신이 꿈꾸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keyword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