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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잎 다섯 장.

언니의 바람(1)

by 글지은

첫 암 수술을 하고 치료를 받으러 다니던 시기 병원에 검진을 갔다. 매번 가는 병원인데 왜 그렇게 긴장되던지. 산부인과 진료를 기다리는 대기실에서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으며 앉아 있는데 옆자리에 웬 예쁜 언니가 말을 걸어왔다. “앉아 있는지 오래됐어요?” 묻는다. 속으로 예쁘게 생겨서 또 이상한 소리 하려고 말 걸어오나 싶어서 건성건성 한 30분 정도 된 거 같다고 답하고 다시 이어폰을 귀에 끼웠다. 병원인 것도 싫지만, 이상한 사람이 말 걸어오는 건 더 싫었다. 대기시간이 길어지고 하품하며 지루해하고 있는데 또 옆자리 언니가 말을 걸었다. ‘이 사람 뭐야….’ 음악 들으며 못 들은 척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내 팔을 툭툭치고 웃었다. 이상한 사람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라 한다.


조금 뒤, 간호사님이 그 언니를 먼저 불렀다. 얼떨결에 이름을 알았다. 수현 언니를 이상한 사람 보듯 하며 처음 만났다. 별거 없이 지나쳐 갈 수 있었을 텐데 서로 번갈아 정기검진을 받으러 와서 나눈 첫인사였다. 진료실 들어갔다가 나오면 가고 없겠지. 무심하게 지나쳐 검진을 받고 나왔는데 떡하니 의자에 계속 앉아 있었다. 원래 성격이 처음 보는 사람한테도 말을 잘 거는 사람 인가 했다. 진료실에서 나오는 내게 다가와 커피 마시자며 달라붙었다. 매일 애들 보며 혼자 있는 게 익숙한 내 옆에 갑자기 친한 척 팔짱 끼고 들어오는 손이라니. 당황스러웠다.


예쁜 얼굴이라 그런가 웃는 모습이 왠지 밉지 않았다. 서로 이름은 이미 진료실 간호사님에 의해 공개됐으니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랑 카페에 와서 달달한 커피를 마셨다. 이야기하다 보니 사는 곳도 가깝고 언니가 성당 다니는 것도 알게 됐다. 가끔 이렇게 만나서 이야기도 하고 지내자고 언제 집으로 놀러 오라 하며 헤어졌다. 참 이상한 사람이다.


가까이 산다는 게 외로웠던 나한테 조금의 위안이었을까. 수현 언니를 만나고부터 조금씩 우울했던 기분도 나아지는 것 같았다. 매일 같이 다니는 병원행이 즐거워졌다. 아파서 맨날 병원에 들락날락하면서도 웃는 언니 얼굴을 마주하니 덩달아 웃었다. 둘이 암으로 병원에 다니고 같이 항암치료 다니는 사이라니. 일부러 짜 맞춰서 이렇게 만나긴 어려울 거다. 누가 보면 몇 년은 알고 지낸 사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만난 지 고작 몇 달 사이 우린 누구보다 친해졌다. 언니의 밝음이 전이라도 된 듯 웃는 날이 많아졌다. 아프다고 칭얼거릴 수 있는 사람이 생겨서 좋았다. 언니도 아플 텐데 치료받고 아프다며 옹알거리면 기분 좋은 듯 언니는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며 괜찮다 괜찮다 해준다. 태어나서 친엄마한테도 아프다고 투정 부려본 적 없는 무뚝뚝하고 무표정한 내가 언니한테는 마음껏 투정 부릴 수 있다는 게 행복했다.

언니랑 병원 진료가 끝나는 날이면 따뜻한 차라도 마시자며 언니가 차 끌고 예쁜 카페를 데려가 줬다. 어느 날은 디저트 카페, 어느 날은 고풍스러운 찻집, 어느 날은 갤러리처럼 꾸며진 카페…. 맨날 기분 전환 삼아 가도 집 근처나 무인카페 가는 게 전부였던 내게 신세계 같았다. 아플수록 맛있는 것도 많이 먹어야 한다며 자신도 같이 아프면서 꿋꿋하게 나도 챙겼다. 언니랑 같이 다니는 카페 탐험이 제일 많이 신났다. 둘이 짧은 머리를 하고 카페에 앉았다 하면 수다스러웠다. 나중에 다 나으면 같이 머리 기르고 서로 핀도 같이 사서 꼽고 여행도 같이 다니자며 호들갑을 떨었다.


언니는 얼굴도 예쁘고 몸매 좋아서 머리 길면 더 예쁠 거라고 모자도 멋스럽게 쓰면 멋쟁이 될 거라고 치켜주면 얼굴 새빨개지며 이젠 자기한테 너스레도 잘 떤다며 능글맞다고 웃었다. 아들의 장애 등록을 하고 좋지 않았던 마음을 조금이라도 빨리 정리할 수 있었던 건 매일 곁에서 토닥여주고 같이 울어준 언니 덕분이었다. 수현 언니랑 난 그렇게 1년이란 시간을 병원 함께 다니는 동지로, 언니 동생으로 서로를 의지하며 보냈다.


아이를 데리고 버스 타기 훈련하며 지칠 대로 지쳐서 찾은 곳이 성당이었다. 몇 번이고 다녀보라 했지만, 종교라면 질색했던 터라 언니한테도 더 말하면 화낼 거라며 싫다 했었다. 몸도 마음도 너무 녹초라 힘들었던 시기.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 들어가 도움을 청했다. 처음 미사에 참여한 날, 영성체를 모시기 위해 사람들이 줄을 서고 피아노 소리가 들렸다. 그 피아노 소리가 왜 그렇게 구슬펐는지 참 모를 일이다. 미사가 끝나고 눈물 콧물 범벅이 되도록 펑펑 울었다. 오히려 옆에 있던 대모님과 다른 분들이 당황하시며 토닥여주시느라 진땀 뺐다. 아무 생각 없이, 아무 거리낌 없이 정말 대성통곡을 했다.

며칠 뒤, 언니가 내 등을 찰싹 때리며 “야! 성당 갈 거면 같이 가지 왜 너 혼자 가?”하며 서운해하더니 금방 배시시 웃으며 잘했다고 토닥인다. 소개받은 대모님도 그렇고 수녀님도 좋게 봐주신 거 같다며 좋아해 줬다. 그러고는 또 잔소리한다. “다른 사람한테도 나한테 하는 것처럼 어리광도 부리고 능청 좀 떨어봐. 왜 그렇게 딱딱하게 굴어.” 그놈의 잔소리 좀 안 할 수 없냐며 이렇게 생긴 성격인데 어쩌냐고 되받아치면 또 등을 얻어맞았다.

“이 언니는 네가 내 앞에서 웃는 얼굴, 예쁜 얼굴, 기쁜 얼굴, 어리광 부리는 거, 귀찮다며 투덜거리는 거, 투정 부리는 거, 화내는 걸 다 하는 것처럼 능글맞지만 단단한 마음이란 걸 다른 사람도 봤으면 좋겠어. 그게 이 언니 바람이다. 알았어?” 웃으면서 더 능글맞게 말하는 언니의 말에 날 너무 과대평가하는 거라고 언니 등에 손바닥을 찍었다.

진짜 그렇게 생각한다며 호탕하게 웃는 언니가 내 눈엔 너무나 예뻐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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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