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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푸른 시절 18화

17. '상륙기'와 '사시안의 객담'

by 연후 할아버지

17. <상륙기>와 <사시안의 객담>


앞에서 예로 든 몇 가지는 이 글을 쓰기 시작하며 계획했던 범위를 벗어난 것들이다. 맑고 푸르던 시절의 얘기만 쓰려고 했는데, 쓰다 보니 욕심이 생겨 사족을 많이 달았다.


우리의 삶도 그렇다. 자선사업을 하기 위해 사업 계획을 짜는 사람이 드물 듯이, 초심을 잃지 않으면 실패할 까닭이 없는데, 중간에 샛길로 빠져들어 재난을 겪는 경우가 가끔 생긴다.


소제목으로 사용한 <상륙기>와 <사시안의 객담>도 뜬금없고 엉뚱한 등장이다. 이것들은 30여 년 전(1990년대 초반, 1991/2년?)에 <신동아>와 <월간 중앙>이라는 잡지들이 논픽션을 모집하기에 응모하고 당첨되어 당시로서는 거금의 상금을 받았던 내 글들의 제목인데, 갑자기 떠올라 본문도 없이 제목만 삽입시켜 봤다.


지금도 그 잡지들이 발간되고 있는지, 때때로 논픽션을 모집하는지, 심지어는 그때 내가 썼던 글들의 내용마저도 아리송해 분명한 건 아무것도 없다.


상륙(上陸)이란 단어는 바다에서 육지로 나갔다는 뜻이고 ‘기’란 기록했다는 의미니, 그 글들을 썼던 시기와 대비시켜 유추해 보면, 선원 출신인 내가 육상 근무를 할 때 경험했던 일들과 느꼈던 소회들을 정리해 본 게 아니었나 싶다.


사시안은 ‘사팔이, 즉, 삐딱한 시선을 가진 사람’이란 의미이고 객담(客話)은 ‘손님들끼리 주고받는 잡담’이라는 뜻이라, ‘비상식적인 관점이지만 여러 사람들의 공감을 얻는 대화’로 써 보겠다는 의지를 나타냈던 걸로 보이므로, 이것도 비슷한 내용이지만 표현 방법을 달리 했을 확률이 높다.


(같은 시기에 서로 다른 잡지사로 동일한 소재를 써 보내지는 않았을 테지만, 오래전의 일이고 본문을 찾을 수 없으니 확인해 볼 수 있는 방법도 없다.)


인터넷 속의 기록들을 뒤져보면 나올 수도 있겠다 싶어서 접속을 여러 번 시도해 봤지만 실패했다. 한바다에서는 신호가 약해서 연결조차 되지 않을 때가 잦지만, 한 번 꽂히면 쉽게 포기할 줄 모르는 성격이라 몇 시간이나 애를 써 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설혹 그게 찾아진다고 변할 일도 없는데, 부질없는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일단은 중지하고 말았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글을 빨리 쓰고 한 번 쓴 글을 다시 읽어보거나 바꿔 쓰는 일을 극히 싫어한다. 어렸을 때 학교 대표로 백일장 대회에 자주 나갔는데, 처음부터 잘 풀리면 장원이고 중간에 고치기 시작하면 낙방이라 중간 성적으로 당첨된 적은 거의 없었다는 경험이 만든 고정관념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논픽션들을 쓸 때도 비슷한 태도였을 것 같은데, 그래도 당첨되어 상을 받았다는 건 어느 정도는 여러 사람의 공감을 이끌어 냈던 것 같다. 글재주가 있었다기보다는 관찰자의 자유분방한 사고와 시각이 육지에 살던 사람들과는 달라서 심사하신 분들에게 신선하게 느껴졌을 수는 있었겠다.


내가 그것들을 쓰던 무렵에, 소설가 <이병주> 선생님께서 작고하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와는 동향이고 친구의 삼촌이셔서 가끔 찾아가면 친조카라도 만난 듯 반갑게 맞아 주곤 하셨다.


(논픽션을 생각하면 그분이 먼저 떠오르는 건, 조언을 구하려 찾아뵈려고 연락드렸다가 입원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대학병원으로 가서 병실로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복도에서 쾌유를 비는 기도만 하고 돌아왔던 기억 때문이다. 그런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별세하셨다는 뉴스를 봤다.)


중년 이후까지 언론인 생활을 하시다가 늦게 등단하셔서 주옥같은 작품들을 많이 남기셨는데, 평균을 내보면 매일 원고지 1000매 이상의 글을 쓰셨다고 계산될 만큼 다작으로도 유명하셨다.


내가 쓴 글들을 읽어 보시고는 소질이 있다고 해양 문학을 해 보라고 권하시던 게 엊그제 같은데, 긴 세월이 흘렀다. 그렇게 시간에 쫓기며 사셨던 분께 어쭙잖은 습작이나 봐 달라는 부탁을 드렸던 건, 나중에 생각해 보니 정말로 철없고 어리석은 짓이었다.


귀찮다거나 싫어하는 기색을 조금이라도 나타내셨더라면 자제라도 했을 텐데, 언제나 호탕하게 웃기만 하셔서 그렇게 떼를 써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줄 알았다.


내가 그렇게 시간을 빼앗지만 않았더라도 좋은 작품을 몇 개라도 더 세상에 남기시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에 들어 후회가 막심했고 지금까지도 늘 죄송한 마음을 간직하며 살고 있다.


연세가 드셨으니 남은 수명에 한계를 느껴 욕심을 부리신 것이겠지만, 그분의 글들을 다시 읽을 때마다 호방하고 넉넉한 그의 성품이 문장마다 녹아 있어 감탄하곤 하지만, 빨리 쓰고 재검토를 하지 않은 흔적들이 자주 눈에 띄는 게 옥에 티다.


태양과 반딧불의 차인데, 돈키호테처럼 감히 누구와 비교하고 비판하느냐고 나무랄 분도 계시겠지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발언은, 글의 수준이 아니라 나의 못된 습관과 약점을 고백하고, 감안해 읽어 달라고 부탁드리는 것이니 크게 질책당할 일은 아닌 듯하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나는 또 논픽션 비슷한 글을 다시 쓰고 있는데, 그때보다는 기억력도 많이 흐려졌고 사고의 유연성도 떨어졌음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지만, 아직도 끈기와 근성은 남아 있는지 일차적으로 목표했던 분량만은 거의 다 채운 것 같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재미가 없으니 노인의 푸념이라 생각하고 아무도 읽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바로 말씀을 않으시고, 내가 사이사이에 되지도 않은 농담들을 끼워 넣은 것처럼, 여러 가지 비유를 드셨던 것 같다.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어라.(Amen. amen, I say to you, Whoever has ears to hear ought to hear.)’라는 말씀을 자주 덧붙이셨다.


신발 끈을 묶는 게 아니라 그림자를 밟기도 황송한 종이 하찮은 일에 당신의 말씀을 인용하는 건 큰 죄악이 되지 않을까 두렵지만, 오랜만에 글이란 걸 써 보니 당신의 심정을 약간은 이해할 것 같아서 흉내를 내 봤다.

(그분은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라 적재적소에 알맞은 비유를 쓰셨지만 나는 아무리 노력해 봐도 여전히 어색하다. 수준 차이가 너무 많이 나서 들이대기도 민망하지만, 마음의 교류를 뜨겁게 갈구하는 정성으로라도 받아 주면 좋겠다.)


‘보석은 광산과 제련소, 백화점 등에서만 구입하는 게 아니라 뒷골목에서 얻을 수도 있고 쓰레기 더미 속에서 주울 수도 있다’는 출처도 알 수 없는 글귀가 책상 앞에 붙어 있어서 그걸 안주 삼으며, 생각나는 대로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쓴 글이니 부담 없이 읽다가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나오면 버리거나 건너뛰어도 무방하다.

어차피 논픽션 모집 같은 데 다시 응모해 볼 생각은 추호도 없고, 그동안 하고 싶었고 해야 할 일을 끝냈으니 그걸로 만족하고 감사할 뿐이다. “지금, 네 꼬라지를 알라.”라고 테스 형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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